8. 내가 흘려보낸 여름
『보물섬』으로 널리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어린이들을 위하여 엮은 시집 속에 「여름잠(Bed in Summer)」이라는 것이 있는데 대강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겨울에는 깜깜할 때 일어나
노란 촛불 곁에서 옷을 입는데
여름은 이와는 달리
대낮부터 자지 않으면 아니 되는구나
아, 이건 너무하구나
하늘은 맑고 푸르러
좀 더 즐길 마음인데
하얀 대낮부터 자야 하다니
이처럼 영국의 여름은 낮이 밤의 네 배에 가깝게 길다. 물론 더 북극권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점점 더 길어지겠지만, 영국만도 충분히 낮이 길어서 하지쯤에 이르러서는 새벽 3시경에 이미 밝아있다. 밤은 10시가 지나야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거의 어둠을 모르고 여름 한철을 지내게 된다. 영국의 여름이 여름다운 점은 이와 같이 주간(晝間)이 몹시 길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전부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맞은 첫해(1978년) 여름은 몹시도 선선했다. 우리나라에서 4,5 월만도 못한 한여름의 기온은 히터 없이는 잠을 뒤채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써늘하기까지 하였다. 여름동안 한 번이라도 땀을 흘려본 기억이 없을 정도이다.
여행자들이나 일시 체류하는 사람들은 하나를 보고 열을 알기라도 하듯 일면만을 겪고도 전체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양 착각하는 속성이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첫해를 보내며 우선 든 생각이 여름이 이래서는 낭패다 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기온 변화에 대한 이곳 여인들의 민감한 대처로 인하여 한여름에는 시야에 퍽 신선한 경치가 전개되겠거니 하는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해 또 한해를 지내보니까 첫해보다는 좀 나아졌는데 그래봤자 여름철은 동기(冬期)에 비하여 비교적 비도 덜 내리고 한참 더워야 우리나라 5월 정도의 기온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여름에 입기 위하여 가져갔던 반소매 와이셔츠, 노타이, 가벼운 여름양복 등속은 한 번도 걸쳐보지 못한 채 먼지만 얹혀서 다시 싸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여건으로 해서 영국인들은 햇볕에 굶주려 있으며 또한 땀나는 날씨를 무척 아끼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내 느낌으로는 이 사람들은 '덥다'(hot)라는 말 쓰기를 터부시 하는 것 같다. 어느 날인가는 땀도 좀 나는 것 같고 그중에서 꽤 더운 듯한 기분이어서 'hot'라는 말을 썼더니 '대단히 따뜻하다'(very warm)고 바꿔 대꾸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아마도 아무리 더워도 거슬리지 않는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쩌다가 햇빛이 반짝 들고 '대단히 따뜻한' 정도의 날씨이면 시티 도심의 작은 공원들은 샌드위치 정도로 점심을 때우고 여분의 시간에 될 수 있으면 보다 많은 햇볕을 쪼이기 위하여 스커트 자락을 걷어올리거나, 남자의 경우 웃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앉아서 한담을 나누거나 누워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 그 사이로 브래지어의 뒷 단추를 끄르고 수영복도 아닌 일상의 속 팬티만의 몸으로 엎드려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뜻밖의 이변으로 눈 안에 크게 확대되어 들어오는데 정작 장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모두 태연하다. 그러니 나로서도 제어하기 어려운 심적 동요와 놀람을 애써 정리하면서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겨 딛지 않을 수 없었다. 모처럼 잡은 일광욕의 좋은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워 취한 실례이리라. 이러한 햇볕 바라기는 모두 지독한 갈증 끝에 만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듯한 태도, 바로 그런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기후 탓으로 하여......
"다른 나라에는 기후(climate)가 존재하는데 영국에는 일기(weather)가 있을 뿐이다." 영국사람들이 자기 나라 기상(氣象)을 비유하는 말이다. 아침은 봄처럼 상쾌하고 포근한 하루로서 깨어나지만, 한두 시간쯤 지나면 갑자기 어디서 몰려왔는지 검은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온은 섭씨 8, 9 도쯤 뚝 떨어지고 한낮은 겨울처럼 써늘해지지만 오후 늦게 다시 개이고 햇빛이 비추면 어두워질 때까지 온화한 여름이 된다. 흔히 경험하게 되는 도깨비 같은 영국의 날씨. 그래서 단 하루에 사철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나라는 영국 밖에 없다고 스스로들 자랑처럼 여기는 모양이지만 이것은 달리 보면 연중 사계절이 불분명하다는 역설도 성립하고 또한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기나긴 여름의 하루. 게다가 주말은 언제나 연휴이니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는 방법을 생각하던 끝에 바다를 찾는다. 여름 바다. 우리에게 있어서 여름 바다는 무엇이었던가? 그곳은 언제나 무더위에 지치고 땀으로 얼룩진 끈적끈적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곳이며 뜨거운 정열을 더욱 뜨겁게 불사르는 장소인 것이다. 짙푸른 바닷물의 양감(量感) 있는 출렁임과 밀려와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비말(飛沫). 이러한 것들로 하여 걷잡을 수 없는 기대와 종잡을 수 없는 흥분이 뒤범벅되는 상태로 이끄는 곳, 그곳은 바로 우리의 푸른 꿈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은 우리보다 한 면을 더하여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여서 바다를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국 땅의 어느 지점에서도 120 킬로 이내에 바다가 있다. 런던 남쪽으로 백 킬로 정도 떨어져 바다에 면해있는 도시만도 브라이튼을 비롯하여 워싱, 포츠머스, 헤이스팅스 등 일일이 매거(枚擧)할 수 없을 정도로 즐비하다.
이 중에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브라이튼으로서 런던에서 80 킬로쯤 거리에 기차를 한 시간가량 타고 가면 닿을 수 있다. 여름에 런던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하여 '해변의 런던'이라고까지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아보고 내가 그동안 품어오던 바다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었다. 흐린 하늘에 걸맞게 뿌옇게 흐려있는 바다 물빛은 거대한 탱크에 채워놓은 저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모래사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으나 멍하니 앉아 태양이 구름 속에 들락날락하는 것에 맞춰 마치 구령에 따라 체조라도 하듯이 스웨터 등의 두꺼운 겉옷을 걸쳤다 벗었다 하고 있었다. 다만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은 '훤 훼어(fun fair)'라 불리는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즐기는 놀이시설이었다.
그 뒤로 몇 군데의 해안도시를 더 찾을 기회가 있었으나 브라이튼에서의 인상을 크게 바꿔주지는 않았다. 나중에 브라이튼에는 누드캠프가 설치되어 한 번 가볼까 하는 호기심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철도 놓치고 무엇보다도 태양의 후끈한 열기가 없는 한 유명무실하리라는 생각이 앞서 끝내 그 뜻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에는 바다가 키워주지 못하는 꿈을 대신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캠핑생활의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숲 속, 호숫가, 농장, 바다를 낀 언덕, 초원 등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나 아늑한 곳, 시원한 장소, 전망 좋고 경치 좋은 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캠핑장소에서 하루 1, 2 파운드 정도의 싼값으로 대자연과 가장 가까이, 맑은 공기에 피부를 적시며 지내는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장소에 따라서는 텐트가 아니더라도 케러밴(caravan)이라는 이동주택을 끌고 가서,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커다란 컨테이너를 정렬해 놓은 것처럼 늘어놓고 빌려주는 것에 의하여도 이 생활은 가능하다. 이러한 곳들은 안전하고 깨끗하며 수도, 샤워, 화장실, 매점 등의 시설을 완비하고 있어 지내는데 조금도 불편이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름철이 좀 더 더운 풍토라면 이와 같은 생활의 즐거움은 배가될 수 있으리란 것이다.
역시 여름은 뜨겁고 땀을 흘리는 맛이 있어야 여름답게 느껴지고 여름만이 갖는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사람들은 휴가로 피서를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열기(熱氣)가 후끈한 남불(南佛) 해안이나 이태리 등의 지중해 해안도시로, 또는 바하마나 바베이도스 등 대서양 상의 섬나라로, 여름다운 여름이 있는 휴양지를 즐겨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