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취미처럼 지키는 질서
영국사람들의 보수성에 대하여는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그들을 접하며 보면 듣던 것 이상으로 폐쇄적인 것, 다시 말하여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반발심이 인다. 그들은 아무리 모르는 사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짧은 말로 인사를 건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자는 태도를 보이거나 지나친 호의를 주려 하지 않는다. 이웃하여 사는 동안 크리스마스라든가 무슨 때가 되어 우리가 작은 성의를 보여 주면 즉각 거기에 걸맞은 답례가 오지만 이들이 먼저 베푸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았다.
영국 속담에 '영국사람의 집은 그들의 성이다'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영국사람의 보수성 내지 폐쇄적 성향과 사생활을 존중하는 태도라 하겠다. 자신의 것은 물론 상대방 나아가서는 모든 타인의 귀중한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을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사로운 생활이 방해 안 되도록 노력하고 간섭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방관하는 것도 아닌 게 이들의 특성인 것 같다. 달리 말하여 고발정신이 투철하다고 할까.
처음에 그곳에 갔을 무렵,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영국사람들은 집안에 들어앉아 엷은 베일(그들의 창은 반투명의 흰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너머로 주목하고 있으니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우리와 저들과의 인습이나 관념의 차이에서 대수롭지 않게 저질러지는 실수로 인하여 고발되어 곤욕을 치르는 일이 없도록 미리 주의하라는 것이다.
'○월○일, ○요일 ○시에서 ○시 사이에 이 지점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하여 아시는 분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의 경찰서 노란 표지판은 노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목격자의 증언으로 일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는 흰 페인트를 일정한 간격으로 칠해놓아 얼룩말처럼 되었다 하여 지브라 크로싱(zebra crossing)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보행자가 한쪽 발을 차도에 딛고 서 있으면 모든 차량은 정지하여 보행자가 안전하게 건너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규칙을 잠시 무시 또는 망각하고 그대로 지나치는 차를 보고 수첩과 볼펜을 빼어 드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실제로 사람은 이미 전임(轉任) 귀국해 있는데 그의 당시 직장으로 당신은 보행자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쳤으니 경찰서로 출두하여 달라는 통지서가 배달된 예도 있다고 한다. 어느 누군가의 제보에 의한 결실인 것이다. 이들은 사회 질서를 스스로 지킴은 물론 각자가 경찰을 돕는 입장이다. 일반 시민이 모르는 듯하면 가르쳐주고 위반하는 것은 고발하여 질서가 바로 잡히도록 하려는 의식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생활화된 듯하다. 결국은 이것이 스스로의 생활을 보호하는 방편인 것이다.
런던 중심지의 주위로는 전국 각지와 이어지는 열몇 개의 기차터미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지하철역을 겸하고 있어서 같은 자리에서 갈아타고 시내 어디든지 닿을 수 있다. 워털루는 남부지방선의 런던 역으로 이곳에는 지하철 외에 '워털루-시티 라인'이라 하여 템스강 밑을 통해서 세계적 금융중심인 시티의 뱅크 역까지 만을 왕복하는 셔틀이 있는 곳으로 아침 러시아워의 워털루 쪽 플랫폼은 아마 가장 붐비는 곳이 아닌가 한다. 각처에서 끊임없이 도착하는 기차로부터 풀려 나오는 인파의 대부분이 시티근무자들로서 이 셔틀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실어 날라도 피크타임에는 승차장뿐만 아니라 집표구(集票口) 밖 양편 층계 위에까지 출근자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바삐 서둘러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은 3분 내지 5분만 더 기다리면 앉아서 편히 갈 수 있음에도 틈만 있으면 올라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잠깐의 동요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꽉 들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일견 혼잡한 것같이 보이나 움직이면서 줄이 만들어진다. 이 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앞지르려는 기미를 보였다가는 누군가에 의하여 여지없이 지적을 당하게 된다.
영국사람들에게는 또한 양보질서가 있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식으로 피차간의 지나친 양보로서 혼란을 빚는 일이 없다. 어느 누가 먼저 양보를 하면 그 상대방은 곧 고맙다고 수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양보가 자기에게 과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정말이냐?"라고 물어, 한번 다짐하는 것이 다르다 할까.
영국이 요즈음에 와서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졌느니 어쩌니 해도 인구 4, 5 명당 자가용 한 대 꼴이라는 많은 차량과 좁고 구불구불하기로 유명한 도로 위에서도 교통사고가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것은 운전자 각자가 상황을 판단하여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또 양보받으면 반드시 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시하는 질서의식 때문이리라.
어떻게 보면 영국사람들은 사회를 정연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취미인 것같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 이들에게는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리면 반드시 공정하게 순서가 닿는다는 절대적인 보장과 더불어 혼잡을 제거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려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있는 것도 질서가 무리 없이 유지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지 않나 생각된다.
어느 장소에든 출구를 만들어 놓고 입구를 설치한 것으로 생각되게 이 두 가지가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고, 동종업무를 취급하는 창구가 여럿인 우체국이나 은행 등은 이용자들이 들어오는 대로 오직 한 줄로 서게 하여 창구가 비는 대로 차례로 응대해 준다든지 좀 더 복잡하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찾아오는 순서로 번호지(番號紙)를 배부하고 순번 대로 손님을 불러 일을 처리하는 것 등은 질서를 지키는 대상에게 자리권을 지켜주려는 배려이며 이로 인하여 일은 무리 없이 처리되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푸른 잔디밭, 우거진 나무 숲,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이 곱게 피어있는 드넓은 공원 또는 숲 속 등은 한 보따리 싸들고 가서 거나하게 취하며 노래 부르고 저절로 흥이 나면 흔들어대고 기분 풀기에 좋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바로는 이렇게 이용(?)할 줄 아는 영국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싸 온 것을 차 안에서 간단하게 처리하거나 근처 스낵에서 쉽게 먹어치우고 가족끼리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거나 멍하니 드러누워 햇볕을 쪼이는 게 고작이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무슨 재미로 사는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며 태양의 은총을 한 몸에 누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어쨌든 영국사람들은 각자가 스스로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며 그쪽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함에 틀림없다. 내 눈에 비치기로는 그것이 이들 삶의 기본자세이며 즐거움으로 행하는 취미와 같이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