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생활(6)

by 김헌삼



6. 런던 안의 런던, 시티



런던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32개의 구(區)로 나뉘어 있는 행정구역으로서의 런던(Greater London)은 1,560 평방 킬로, 수도경찰국 관할지역으로서가 2,012 평방 킬로이며 런던 공영교통이 미치는 지역으로서의 런던이 2,340 평방 킬로로 그 범위가 가장 넓은 반면 시티 오브 런던(The City of London), 약하여 시티(The City)라고 불리는 자치지역은 불과 15분 내지 20분에 걸쳐 통과할 수 있는 1 평방 마일(2.56 평방 킬로)의 크기에 지나지 않는 런던으로, 이와 같이 다양하게 분류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런던이라 하면 그레이터 런던과 그 정 중앙에 위치한 자치지역인 시티를 합하여 일컫는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레이터 런던에는 시티가 포함되지 않는데 그것은 시티가 그 밖의 런던, 나아가서는 전영국(全英國)과는 달리 매년 역내의 각종 직인(職人) 동업 조합대표들이 모여 선출한 로드 메이어(Lord Mayor)라는 시장이 통치하도록 자치권이 인정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티는 독자의 행정체제와 독자적인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여왕도 시티에 듭실 때는 런던특별시장의 사전 양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왕이 시티에 들어오려고 할 때 로드 메이어는 그리핀 상(像)(사자 몸뚱이에 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진 괴물의 상)이 지키고 있는 템플 바라는 시티의 관문인 경계선까지 마중 나간다. 그는 여기서 그의 절대권의 상징인 '보검(寶劍)'을 서슴없이 여왕에게 바친다. 이로써 시티도 영국의 일부임을, 여왕의 군주권 하에 시티가 있음을 서약하며, 여왕은 또한 이 보검을 받았다가 다시 시장에게 돌려줌으로써 시티에 대한 시장의 자치권을 확인하는 것이다.

시티는 오늘날 런던의 발원지로서 2천여 년 전 로마인들이 침입했을 때 템스강 북 안에 성벽을 쌓고 진을 치면서 시작된 역사 오랜 고도(古都)이다. 중세에 들어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주로 상공업 길드상인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본고장으로 성장하였다.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1215년)하기도 훨씬 전(1191년)에 이곳은 상인들에게 이미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영국이 세계도처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가의 번영과 함께 양모, 모피, 고무, 차[茶], 다이아몬드 등 상품시장이 되었고 곡물 금속 등의 거래가 성행하였다. 부수적으로 국제 간 해운 보험 중개 외환 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근래의 영국경제는 옛날 같지가 않다. 국제 무드는 식민지를 거느린다는 것이 요즈음 세상에 종 거느리는 것처럼 어색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을 하나둘 독립시켜 주게 되고, 부리며 살던 신세가 스스로 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니 그것이 이들에게 적응되기가 쉽지 않았다. 일이 잘 안 되니 불만은 높아지고 보장된 자유에 스트라이크를 일삼으니 생산성은 떨어지고 실업인구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다. 파운드화는 이제 세계통화의 선두대열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영국의 경제력은 빛을 잃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티는 국제금융 중심지로서의 지반을 굳혀가고 있으며, 오히려 이곳에 진출한 외국은행 수는 불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부임했던 1978년에 308개였던 것이 3년 뒤 귀국하던 해 말에는 422개로 100개 이상 늘어났다. 시티에 들어와 있는 외국은행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미국계 은행으로서 76개. 뉴욕에 진을 치고 있는 미국은행들보다 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이 중에서 직원 수가 천 명이 넘는 곳만도 4개 은행이나 된다. 이들은 2,42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유로달러시장을 활용하기 위하여 진출해 있는 것이다.

체영(滯英) 기간 중 가장 빈번하게 들락거린 데가 내가 살던 동네 길 파트니 힐이었다면 두 번째로 친숙한 곳이 시티의 뱅크 지하역에서 솟아올라 영란은행과 뉴욕 다음으로 크다는 증권거래소를 끼고돌아 우리 지점이 자리 잡은 런던 월(London Wall)에 이르는 길이다.

뱅크 역에서 지상으로 빠져나오면 로터리의 남쪽에 로드 메이어 공관(Mansion House)이 자리 잡고 그 건너편에 오렌지 공(公) 윌리엄 3세가 백만 파운드의 대불(對佛) 전비(戰費)를 마련키 위하여 설립되어 지금의 중앙은행이 된 영란은행이 마주 보인다. 동편으로는 이제 무명 화가들의 그림 전시장으로나 쓰이는 옛날의 거래소(Royal Exchange)가 서 있다. 이들 세 건물은 모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전면이 우람한 원주기둥으로 되어있어, 이곳을 로마의 발상지 로만 포름(Roman Forum)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이 세 건물을 기점으로 하여 크게 사면칠방(四面七方)으로 갈라져 뻗은 길들이 롬바르드, 콘힐, 스렛니들, 킹 윌리엄 가(街) 등인데 여기에 은행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들 금융기관은 규모에 따라 한 명에서부터 수십 명에 이르는 딜러를 두고 있다. 브로커를 통하거나 직접 전화나 텔렉스로 은행 간에 연결하여 가장 유리한 율로, 여분의 자금과 외환을 빌려 주거나 팔고 부족한 것은 빌리거나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에 움직이는 돈이 2백억 내지 4백억 달러 상당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엄청난 양의 거래가 대부분 오전에 끝나버려 예상치 못했던 자금의 과부족 현상이 뒤늦게 나타나면 이를 평형(平衡)시키기 위하여 런던시간으로는 오후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미주시장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의 경제사정은 한물가고 한동안의 번득임은 그 위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런던 시티가 국제금융시장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는 계속 고수하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첫째, 시티의 높은 신용도와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발달 된 다양한 금융서비스의 존재와 함께 이곳 정책의 우월성을 꼽는다. 영란은행은 이곳에 진출한 외국은행들을 '공인은행(Recognised Bank)'과 '인허예수기관(Licenced Deposit Taker)'으로 분류하여 명단을 정기적으로 각 금융기관에 배부한다. '은행'과 '예수기관'사이에 업무 취급의 제한에 의한 차별은 없으나, 이것은 영란은행이 판정하는 신용등급으로서 어느 의미에서는 명백한 업무 제한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더 가혹한 통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란은행은 영국에 런던 이외 지역에 18개나 되는 점포를 갖고 있고 우리의 연수생도 가끔 받아 주는 중동계 모 은행에 대하여 은행 이름 밑에 'Licenced Deposit Taker'라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부제를 달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영란은행의 입장으로서는 은행이란 타이틀을 주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 요인으로 타임 존의 적합함과 언어의 유리한 점이라 하겠다. 타임 존이라 함은 런던이 시간상으로 홍콩 도쿄 싱가포르 등 극동지역의 금융시장이 폐장할 무렵부터 거래가 시작되고, 오후에 북미로 넘겨주는 호조건의 시간대에 위치하는 것을 말하고 이 나라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세계공용어가 되다시피 한 영어이기 때문이다.

1666년 런던 대화재시만 하여도 시티에는 13만 정도의 거주자가 있었으나 이제 이곳은 밤이 되면 건물 경비원, 몇몇 군데의 호텔 인구를 모두 합하여 고작 7천 명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아침 8시경부터 밀려왔다가 저녁 6시쯤 되면 썰물처럼 빠져버리는 5십여 만 명의 시티 근무자들은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다.(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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