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디의 고장을 찾아서
'이그돈 황야에 있어서 문명은 적(敵)이다. 초목이 처음으로 생성된 이후 대지는 한결같이 고풍스러운 갈색의 의상을 하고 있다. 특별히 천연스럽게 만들어진 만고불변의 옷을. 이 존귀한 단 한 벌의 옷자락에는 좋은 옷을 추구하는 인간의 허영에 대한 일맥의 야유가 깔려있는 듯하다. 어느 누가 현대식 복장을 하고 이 황야에 서있다면 아무래도 그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지상의 복식(服飾)이 이렇게 원초적인 곳에서는 인간의 그것도 아주 고색적이고 수수한 것이라야 할 것이다.' 토마스 하디의 『귀향』중 이그돈 황야를 묘사한 부분이다.
영국에 가기도 오래전에 이 소설을 읽었는데 가시금작나무가 뒤엉킨 이그돈 황야에 붉은 옷을 입은 물감장수 딕고리 벤이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더욱이 물감장수의 붉은 옷과 갈색 황야는 황혼에 검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과 커다란 조화를 이루어 작품 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모조리 망각의 저쪽으로 사라졌어도 무대인 이 이그돈 황야의 모습만은 한 폭의 그림같이 생생하게 기억되어 왔었던 것이다.
하디의 고장 도세트지방을 찾게 된 것은 그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순전히 상상으로만 엮어진 기억들을 작품에 영향을 준 사실에 조명시켜 보려는 욕심과, 그가 태어나서 자라고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앎으로써 앞으로 더 많이 접하게 될지도 모를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시골생활과 그 풍경을 묘사한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실 그의 작품 무대는 거의 그의 고장과 같은 고장 사람들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아예 자기 고장을 중심으로 한 영국 남단부 일대를 고대 앵글로 색슨 왕국의 이름인 웨섹스라 하였고 비록 이야기 속의 지명은 사실과 다르게 바뀌어 표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곳이 실제로 어디를 지칭하는가는 짐작되고 있는 것이다.
『캐스터브리지 시장(市長)』의 캐스터브리지는 실제로는 도체스터로서 이는 도세트지방의 수도이며, 『테스』에서의 킹스 비어나 웰브리지, 탤보세이 등은 각각 지금의 비어 레기스와 울, 그리고 웨스트 스태포드라는 곳으로 추정되며, 또한 『푸른 숲 그늘 아래서』의 멜스토크는 현재의 스틴스포드 마을로 이들 모두가 20마일 이내에 상거(相距)하며 가운데로 '히스'라고 일컬어지는 광대한 황무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이그돈 히스라는 이름으로 『귀향』의 주무대가 된 곳이다.
웨섹스 지방의 중심 도시 도체스터(런던에서 서남방으로 약 120마일 떨어진 곳)에 토요일 오후 늦게 도착하여 하룻밤을 「B B」(Bed & Breakfast를 줄여 말하는 것으로 잠자리와 간단한 아침식사만을 제공하는 일종의 민박)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설 채비를 하며 주인아주머니에게 토마스 하디의 이야기를 꺼내고 생가(生家) 가는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며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과 안경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사진은 하디의 장례식 광경을 찍은 것이며 안경은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것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집에는 얼마 전까지 일본 학생이 매주 주말마다 런던에서 내려와 묵으며 하디의 행적을 찾아다니며 그의 문학과 그 배경을 연구했다고 한다. 벌써 하디의 고장에 와있음을 실감케 한다.
도체스터를 잠깐 비껴 서면 토마스 하디가 태어나고 살았던 하이어 복햄턴 모옥(茅屋)이 있는 동네여서 그곳을 향해 길을 뜬다. 민박집 여주인이 가르쳐 준 대로 충실하게 찾아 나섰는데도 한적한 시골이라 길은 좁고 도로표지가 잘 안 되어 지척에 두고도 이리저리 헤매어야만 했다. 그 덕으로 두루두루 구석까지 인적이 드문 생울타리 길, 고즈넉한 숲 속 길을 들락날락하며 그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디의 생가인 초옥(草屋)은 잡목 숲 구릉을 뒤로하고 그 자락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처마 위로 지붕창이 뚫려있고 등성마루 중앙과 그 양쪽에 굴뚝이 달린 너 새 지붕의 나지막하나 기다란 일자형의 초가집이었다.' 초가의 앞쪽 중앙 현관 주위 벽으로는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르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정원에는 갖가지 화초에 몇 더미의 회양목 등 관목과 큰 나무가 어우러져 자라고 있었다. 집 뒤로는 키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이뤄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이 집에서 하디는 그의 이른바 웨섹스소설의 시발이라 할 『푸른 숲 그늘 아래서』를 썼는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행상(行商) 딕 듀이의 집이 바로 이 초옥이며 그 내용도 하디가 자라던 시절의 이곳 사람들 생활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하디의 생가는 현재 내셔널 트러스트(성 저택 교회 등 역사적 건물과 보존가치가 있는 정원 해안선 산 들 등 풍치 좋은 자연을 맡아 보호 관리하는 민간단체)가 관리하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라 오늘은 쉬는 것인지, 집 주변에는 물어보려 해도 아무도 눈에 띄지 않고 문은 굳게 잠겨있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디의 집(Hardy's Cottage)을 등지고 남쪽으로 동네 어귀까지 나오는 길 양옆으로 몇몇 집이 늘어서있었으며 이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래도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농부, 장사꾼 또는 날품팔이 노동자들 중 어느 누구라도 노상에서 불현듯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보기도 한다.
탁 트인 시야에 생울타리로 경계 지어진 밀밭과 초원이 펼쳐져 있고 초원에는 말들이, 또는 소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보인다. 맑은 하늘아래 5월의 따사로움이 온몸에 휘감기니 이와 같은 환경 속에 살면서 그와 같은 작품들이 탄생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억지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도체스터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12, 3 마일 되는 웨어햄까지는 수십 개의 황야(하디의 작품 속에서는 이들을 통틀어 이그돈 히스로 묘사됨)가 펼쳐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안내 책자에 소개된 윈플리스 히스를 찾은 것은 한낮이 지날 무렵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동안 거개의 히스는 촘촘한 가시 잎 밑에 작은 노란 꽃이 피어있는 가시금작나무 덤불로 덮인 벌판이었다. 이곳은 남북으로 작은 길이 뚫려있는데 그 동편은 언덕을 이루며 역시 가시금작나무 숲이나 서편으로는 헝클어진 고사리 등속과 거칠고 되는대로 자라난 관목 덤불로 덮여있다. 게다가 군데군데 고사목(枯死木)들이 널브러져 있어 어쩌다가 휙 지나가 버리는 차량 소음 외에는 인적이 드문 이곳을 더욱 황량한 기분 속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요 브라이트가 고향의 풀 한 포기, 한 줌의 흙에까지 신비스럽게 여기고 애착을 느껴 나무하기를 즐거움으로 생각했던 곳이자, 도시의 환락을 꿈꾸며 파리로 데려가 줄 것을 기대하고 그와 결혼했다가 그렇지 않음에 크게 실망하여 다른 남자 와일디브에게로 향하는 유스테이샤, 또한 이 여자를 그림자처럼 추적하는 물감장수 딕고리 벤의 발길이 닿던 곳이 여기 어딘가 이리라.
왜 사람들은 때때로 천혜와는 인연이 멀고 인간의 손길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이와 같이 황폐한 것에 애착을 같고 감동하는 것인가? 두어 시간을 머무른 후 이곳을 떠야만 스케줄에 맞게 되었다.
자연은 계절에 따라 그 풍미가 다르며 똑같은 자연의 모습이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감흥은 또한 시시로 변하는 것이거늘 5월의 어느 하루, 그중에서도 한낮의 한두 시간을 지체했던 것으로 하여 이곳에 대한 더 이상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은 피하여야겠다. 이그돈 황야를 보기는 했어도 아직 그것을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그돈 황야의 장엄하고 특유한 영광이 막을 올리는 것은 넓은 들판에 차츰 어둠이 깔리고 낮이 밤으로 이행하는 시각이며 바로 이때 이곳에 있어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이 황야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귀향』의 다른 구절이 그것이다.(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