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코크니 악센트와 BBC영어
런던에서 생활하다 보면 희멀겋고 허우대 좋은 것이 분명 영국 사람으로 판단되는데 우리가 흔히 듣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거친 영어를 말하는 사람과 많이 접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억양이 독특하고 발음을 알아듣기가 몹시 힘드나 이들의 특징 중에는 특히 '에' 또는 '애'로 발음되어야 할 것을 '아'에 가깝게 소리를 내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웨이'(way)를 '와이'라고 한다든지 '페이퍼'(paper)를 '파이퍼'라는 것들이 좋은 예다. '택시'를 '탁시'라고 할 때는 어느 정도 무슨 말인지 짐작되지만 '아이트'라고 '에이트(eight)'를 소리 낼 때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이러한 말 자체, 또는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을 통틀어 「코크니(cockney)」라 부른다.
코크니란 '런던사람'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지만 일반적으로 런던사투리, 또는 런던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코크니라는 말은 원래 런던시내 동쪽에 위치한 보우(Bow)라는 곳의 '메리 르 보우'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지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근대 영국 문학작품 속에서는 『마이 훼어 레이디』라는 뮤지컬로 더 잘 알려진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의 여주인공 에리자 두리틀이 코크니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코크니의 말씨는 듣기가 거북하고 듣고 있노라면 불유쾌하기까지 하다지만 그들의 즉흥적인 위트와 순간적인 유머 감각에, 예외적이고 난처한 상황에 접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능력이나, 한번 하겠다고 맘먹으면 끝까지 도우려는 성향 등은 높이 사줄 만한 것이고 그들은 스스로 긍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또한 의미가 전혀 다른 말들을 섞어 은어로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mouth를 'north and south'라고 한다든지 money가 'bees and honey'로 되고 pound가 'lost and found'로 stairs는 'apple and pears'로 바꾸는 등 전혀 엉뚱하지만, 대칭이거나 유사한 두 단어를 쓰되 말끝의 운(韻)을 맞춰 숨은 말이 무엇인가를 비치는 것이다. "I'm married to a trouble and strife who never stops rabbit and porking."라 하면 말이 되지 않지만 trouble and strife자리에 wife로 rabbit and porking대신 working으로 갈아 끼워 놓고 보면 의미가 통하는 것이다.
이들 은어가 처음 발생한 것은 1860년대의 일로 하층사회에서 불량배나 절도범들이 그들의 대화내용을 경찰이나 일반 시민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이 급템포로 성장 발전해 가는 복잡한 대도시의 생활 속에서는 한참 꽃 피우던 시절 이들의 위트와 유머 넘치는 말들은 사라져 가고 다만 그들의 독특한 악센트는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고 한다.
사투리를 코크니라고 부르는데 반하여 표준영어를 호칭할 때 흔히들 'BBC악센트' 또는 'BBC영어'라고 한다. 영어가 제나라 말이 아니거나 스스로 표준발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영어로 무엇을 설명할 때, 우선 "제 영어가 BBC영어가 아니라 듣기 거북하시겠지만......"하고 서두에 양해를 구해놓고 이야기를 꺼낸다.
간혹 영국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외국에서 왔다고 하면 통상 묻는 말이 "영국 생활이 어떠냐?"는 것이다. "기후를 빼고는 좋다. 좀 더 나은 영어를 하려고 애쓰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고 반문하면 거의 TV를 보라고 권한다. 그중에도 아메리칸 필름은 가급적 걸러내고 BBC가 제작한 프로들을 주로 시청하라는 것이다. 미국 프로를 보지 말라는 것은 이 사람들이 양키들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국영어를 말하는 나라에 와서 그 나라 언어를 익혀보겠다고 하니까 미국영어와 혼동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인 것이다.
첫여름의 이른 아침 숲 속에서 듣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같이 구르는 듯한 미국영어를 듣다가 영국영어를 접하게 되면 좀 또박또박하고 딱딱한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보도를 맡은 아나운서의 말씨만을 따로 놓고 비교한다면 그다지 큰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한다. 영국 아나운서의 발음은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매끄러운 반면, 미국 아나운서는 일반 대중들보다 좀 더 분명한 말을 쓰고 있구나 하는 것이 막연한 내 소감이었기 때문이다.
BBC방송은 TV의 경우 두 개의 채널이 있어 BBC 1은 흥미, 오락 위주이고 BBC 2는 문화, 교양 위주로 편성 방영하고 있다. 라디오는 4개의 채널로 나뉘어 있어 각각 성격이 다르지만 대체로 라디오 1, 2는 가벼운 편인데 반하여 라디오 3, 4는 중후한 프로를 엮어 방송하고 있다.
다른 분야도 흔히 있는 것이겠지만 BBC는 국영이면서도 정부의 입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BBC방송에는 광고라고는 짧은 방송예고가 전부여서, 시청 도중 전혀 짜증 날 일이 없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대중이 원해야 할 것'을 주려는 제작 태도를 꾸준히 지켜오고 있는데 경의를 표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체재하는 동안 오페라 발레 고전 명작의 소개 등으로 교양의 깊이와 폭을 넓혀주고 영어공부에도 심심찮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하여, 1년에 34파운드의 시청료를 영국 정부에 바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는 생각이다.(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