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생활(10)

by 김헌삼


10. 리치먼드 공원의 사슴


비가 뿌리다가는 해가 나타나고 개어있는 듯하다가는 다시 시무룩해지는 것이 대체적인 영국 날씨인 것 같다. 어디를 별러서 가는 날에 비가 내린다고 해서 큰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곧 그치고 개일 것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사철에 따라 큰 변화가 없으므로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여름이라 하여 모질게 덥거나 심한 가뭄이 없으며 겨울철에도 잔디가 새파랗게 살아 있을 정도로 그다지 춥지 않다. 이 나라에 수목이 우거지고 잘되는 것은 이와 같은 기후조건이니 잘 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어느 누구 하나 심심풀이로 나무를 자르거나 집으로 가져가려고 꽃을 꺾거나 하는 일이 없으니 커 나가기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영국에는 공원이 많다. 그리고 공원마다 나무가 무성하고 꽃과 잔디가 잘 가꿔져 있다. 웬만한 공원은 연못까지 갖추고 있어 즐겨 찾아오는 시민들의 심신에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정신위생을 건강하게 해주고 있다.

런던 시내 어느 지점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공원이 있다. 정신 나간 사람까지 한몫 보는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 등으로 유명한 하이드 파크를 비롯하여 그 옆의 켄싱턴 가든. 런던동물원과 야외극장을 내포하고 있는 리젠트 공원. 버킹검 궁에 이웃해 있는 그린 파크와 왕실의 황금마차가 지나다니는 멀 대로(大路) 한편으로 연해있는 세인트 제임스 공원. 4만 5천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는 큐 가든. 그밖에 배터시, 빅토리아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크고 작은 공원들이 곳곳에 골고루 깔려 있다.

그렇게 많은 공원 가운데 리치먼드 파크는 우리들이 가장 잊지 못할 곳 중의 하나이다. 이 공원은 런던 서남 방에 위치하며 하이드 파크와 그 옆의 켄싱턴 가든을 합한 면적의 4배나 되는 약 2천5백 에이커(약 1천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이로서 런던 근교 최대의 공원이다. 한인(韓人)들은 대부분 런던 서남 방에 모여 살기 때문에 비교적 거주지에서 이 공원이 가까이 있다. 따라서 일몰 후 다음날 밝기 전까지 공원 둘레의 6개 문을 닫아두는 시간을 빼놓고는 생각나면 언제든지 자유로이 찾아가고는 한다.

그러면 이곳의 무엇이 그렇게 사람 마음을 끄는 것인가? 그저 좋기 때문이다. 담으로 둘러친 공원이라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지역, 그 속에 적당히 급하게 오르는 언덕길이 있는가 하면 완만한 내림의 구릉지대에 들어찬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칠엽수 등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활엽수들. 나무 하나하나의 생김새는 그것대로 마음에 들고 이들이 모여 이룬 숲은 또한 숲으로서 수려한 경관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려도 막 자라도록 내버려 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꾸밈이 무엇인가는 집어낼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숲에는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사슴이 노닐고 있다. 비교적 몸집이 크고 억새 보이는 붉은 사슴, 뿔이 자라며 넓어지고 여름철에는 몸통에 흰 반점이 돋는 꽃사슴, 호리호리하고 작은 노루사슴 등 모두 6백여 수가 넘는 사슴들이 떼 지어 서식하고 있다. 이 공원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스위스의 산들은 그 중턱에 자리 잡은 작고 예쁜 집들로 하여 산 전체의 아름다움이 더하듯이 리치먼드 공원은 처처(處處)에 군서(群棲)하는 여러 종류의 사슴들이 있으므로 더욱 정이 간다.

공원의 영어 말인 '파크'(park)는 원래 왕이나 귀족들의 사냥터로 구획된 지역을 의미하였던 것이라 한다. 여러 가지 사료(史料)에 의하면 사냥의 대상은 주로 사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리치먼드 파크는 이러한 원래 의미의 공원으로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를 비롯한 여러 왕이 즐겨 사냥하였던 곳이며 가장 높은 지점은 몰이할 때의 요충으로서 '헨리 8세 언덕'(Henry VIII Mound)이라 부른다. 그러나 수 세기 전부터 사냥은 하지 않게 되었고 공원은 특정인의 독점에서 벗어나 이제는 뭇 대중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즐기는 휴식처로 변했다.

리치먼드 공원은 역사적으로 왕실과 인연이 깊다. 공원 동반부 중앙에 위치하는 화이트 장(莊)(White Lodge)은 지금의 엘리자베스 여왕 부친이 왕제(王弟)로 있을 당시 기거하던 곳으로 지금은 로열 발레학교가 되었다. 정문이 되는 리치먼드 게이트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펨브로크 하우스가 있는데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윤허로 당시 수상이던 존 러셀 경의 저택이 되었다. 금세기 전반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버트랜드 러셀이 그의 손자로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하여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후광 없이도 자연의 미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찾을 가치가 있는 곳이 이 공원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의 변화에 따르는 각 계절 특유의 멋은 물론 하루 중에도 해 뜰 무렵과 한낮, 비가 뿌리고 있을 때와 햇빛이 충만할 때에 느끼는 감정의 빛깔들은 모두 다르지만 전부 호감이 가는 것들임에는 두 말이 필요 없다. 절세미인은 웃음을 띠고 있으면 웃는 대로 찡그리면 찡그린 대로의 자태가 예뻐 보인다고 하더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또한 언제 대하여도 싫증 나지 않는 것임을 통감케 된다.

아침 햇살이 나무 사이로 퍼져 드는 임간(林間)에 무심히 고개를 들어 먼 곳에 눈을 주고 서 있는 한 마리 사슴의 무상한 표정. 킹스턴 게이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가쁘게 기어올라 한숨 놓으려 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우뚝한 몇 그루 소나무가 주는 서정은 '동령독고송(冬嶺獨孤松)'이 풍기는 동양의 멋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5, 6월의 신록과 함께 갓 태어나 풀밭에 모여 앉은 새끼사슴들이 주는 신선하고 귀여운 모습. 리치먼드 게이트에서 로햄턴 게이트로 향하여 길게 뻗친 내림 길 오른편 드넓은 초원에 빽빽하게 들어선 사슴들의 멀리 보이는 풍경은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잉글랜드의 가을 나뭇잎들은 칙칙하게 말라 떨어진다. 가을이 찾아드는 곳 어디에서인들 가슴속으로 젖어드는 스산한 기분을 어느 누구인들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을까마는 영국의 가을은 심홍(深紅)으로 또는 샛노랗게 물드는 단풍의 화려함이 없어 더욱 적막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국인으로서 갖는 객수(客愁) 때문인가?

어쨌든 맑은 공기에 낙엽활엽수의 수림(樹林)이라는 호재를 갖추고는 있으나 갑자기 기온이 강하한다는 결정적 튕김이 없으므로 해서 나뭇잎들은 그저 서서히 퇴색하며 리치먼드 공원의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단지 여기저기 마로니에 나무[七葉樹] 밑마다 그 열매를 주우려는 아이들의 부산함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 있을 때도 누구네 인가는 귀국하고 나서 제일 많이 생각나는 곳이 리치먼드 파크 라고 하더라는 소문이 들리더니 나 역시 돌이켜보니 언제고 피로를 느끼거나 무료할 때 들르기만 하면 심신을 편케 해 주던 이 공원이 영국생활의 가장 그리운 것으로서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다.(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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