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들은 다 어디에(7)

by 김헌삼

불러보고 싶은 어머니


평생에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10여 년에 불과하다. 기억이 전혀 없었던, 태어난 직후의 몇 년을 제외하면 그 숫자는 4,5년이나 될까? 내가 갓 10살을 넘겼을 때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다. 엄밀히 따지자면 어머니를 두고 먼저 떠난 것은 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6.25가 발발하여 동생과 함께 외가 동네로 피난하여 지내고 있던 내가 학교에 넣어야 한다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오신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엄마와 동생을 남겨둔 채 홀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전쟁 전까지 우리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인천에서 살았다.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딴살림을 하고 계셨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것으로 짐작된다. 명절이나 조상님의 기일에나 오셔서 제례를 주관하고 바로 돌아가시니까 그밖에 우리 식구와 함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나와 결혼 전의 삼촌은 간헐적으로 왕래가 있었다. 왕래란 그냥 다녀오는 것이 아니고 일정기간 머무르며 지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직업 끝에 방적회사 경리 사원으로 일하며 받아오는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빠듯하게 살았던 듯하다.

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할머니는 11살에 4살 어린 할아버지에게 시집오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랑의 나이 7살이었다. 맏이인 아버지가 태어난 해가 할머니 22, 할아버지 18살 때였으니 그사이 두 분이 10여 년은 어떤 감정으로 지내셨을까 생각해 보면, 신혼이고 결혼생활이라 할 것이 있었겠는가 싶다. 그 나이에 분위기가 좋으면 의좋은 오누이처럼 지내다가도 맘에 안 들면 나이가 더 많은 할머니가 시어른들 눈치 보아가며 할아버지에게 핀잔주고 서먹서먹한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2, 4년 터울로 5남매를 두고 막내 숙부가 태어난 해에 할머니는 35, 할아버지가 31살이었다. 한참 나이인데 여기서 생산이 단절된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두 분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지고 할아버지는 따로 지내게 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된 데는 작은 어머니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내소박이 있었을 거라고 했다. 막내 숙부가 어렸을 때(아마도 열 살 내외로 추정된다.) 먹을게 떨어졌다고 할아버지에게 보내면 야단맞고 도망쳐 오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원망 섞인 어조로 해주시고는 했다. 우리는 이렇게 궁핍함을 견디며 살아온 듯하다. 그리고 할아버지와는 남남처럼 지내지 않았나 한다.

우리가 살던 송림동 123번지는 시의 외곽이어서 자연과 밀접해있었다. 어머니는 들판이나 논밭사이를 다니며 무릇이나 명아주 등 나물을 뜯어와 고거나 삶아 저잣거리에 나가 팔아 살림에 보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집에 살고 있어도 정겨운 눈길을 주거나 대화하는 것을 본 기억은, 어느 날 밤 한 번을 빼고는 없다. “애가 옆에 자는데…”하는 어머니의 마지못하나 싫지 않은 듯한 소리가 낮게 깔려, 잠결에 들렸다. 그 뒤의 일은 내가 다시 잠들었는지 기억에 없지만, 이것이 내가 들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정담이라면 정담의 전부다. 아버지는 아침에 출근을 하면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와 어머니와 나를 들들 볶으며 갖은 행태의 주정을 하여 하루하루 맞고 보내는 것이 지옥과 같았다. 그러다가 동란을 만나 할머니와 아버지는 좀 더 지켜보다 움직이기로 하고 피란길에 나섰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나는 수통 하나 달랑 메고 나보다 12살 위의 삼촌이 피난길에 요기될 것들을 짊어지고 보호자로서 동행했다. 둘째아버지네 동네 예산에서 갈라져, 동생과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갔다. 머나먼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야 하는 고행이었지만 아버지의 혹독한 주정으로부터 벗어나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단절된 시초였다.

할아버지와 나머지 식구들과의 연결고리는 주로 내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인천에, 할아버지네가 서울에 떨어져 살면서도 동란 전 취학한 후 방학이 되면 으레 할아버지네 가서 지내다 개학 무렵에야 돌아오고는 했다. 6.25 이후는 선대의 고향으로 피난 오신 할아버지에게 불려 와 초등학교를 다녔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끼고 살기를 원하며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서할머니는 거두기는 해도 기꺼운 마음은 아니지 싶었다. 아버지를 빗대어 자식을 맡겨놓고 그렇게 모른 채 할 수 있냐는 푸념의 말을 가끔 하여 곤혹스러움을 견뎌야 했다. 빈말이라도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무심하였으니 나는 고스란히 수긍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이때 어머니도 동생은 친정에 두고 홀로 찾아와 오랜만에 두 분이 가까이 있게 되는 자리였다. 할아버지가 두 분이 해후할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두 분은 본숭만숭하고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이혼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찾아온 것은 아버지와 잘 살아보려고 했던 것으로 믿고 싶다. 불륜이나 바람피움 같은 것은 전혀 상상 밖의 일이라고, 한마디로 두 분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정이 없었다고 막연하게 단정하고 싶은 것이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마꾼 앞에 꿩이 한 마리 있었는데 그것을 잡은 것이 살이 꼈다고. 작은 어머니는 결혼 후 아버지가 이유 없이 자주 아팠다는 말을 해주신 적도 있다. 엄마 모르고 사는 나를 위로하는 뜻인지 어머니를 내친 아버지를 위한 변명인지 모르겠다. 이혼 처리된 후 바로 아버지는 재혼했고 외가에 머무르고 있던 동생을 데려오는 것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나에게는 빛바랜 흑백가족사진 한 장이 있다. 내가 꽤나 장성하였을 때 고모님이 주신 것이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보라는 배려가 아니었나 한다. 이 사진에는 앞줄에 할머니를 중심으로 왼편에 어머니가, 오른쪽에는 처녀 적 고모님이 앉아 있고 뒷줄에는 아버지 등 삼 형제가 서있는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신분은 유지되지만 가족사진에서는 빠지는 정도의 것이고, 내가 없는 것은 어머니가 새 식구가 된 직후의 기념사진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40년에 결혼하여 41년에 나를 세상에 내보냈으니 말이다. 내가 있었다면 당연히 엄마나 할머니에 안겨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 본 기억이 없다. 사람이 태어나 맨 처음 배우는 말이, 아니 배우기 전에 저절로 나오는 말이 엄마일 터이니 수 없이 불렀을 것이지만 내 기억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어머니를 대면할 기회가 짧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진을 앞에 하고 '어머니!' 하고 불러보는 것이다. 그렇게 라도 불러보고 싶은 것이다.(2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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