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배지를 못 달 뻔했다
얼마 전 모처에 제출할 필요가 있어서 주민센터에서 인감증명을 발급받으려니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담당 직원은 신분증 제시 외에 본인 확인을 위한다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선 지금 주소로 옮겨오기 전 동네 이름을 묻는데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이름은 가락 3차였던 반면 동네는 오금동이었던 것 같아 가락동이었는지 오금동인지 헷갈려 우왕좌왕하자 다음 질문으로, 그렇다면 군복무 시 갖고 있던 군번을 대보라고 했다. "3261611!"하고 마치 현역병으로 돌아간 듯 씩씩하게 답하고는 나도 모르게 '그 오래전 것을!'하고 원망 비슷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대견한 투의 혼자소리를 했다. 50여 년 전의 군번 기억은 이렇게 한번 써먹을 일이라도 있었지만, 아무 쓸데없는 당시 지급받았던 칼빈 소총 총기 번호 '2757275'도 잊지 않고 있다. 그때 총기번호는 필수 암기 사항인데 '2757 2757 2757...' 하며 계속되는 수열의 앞 7자리를 뚝 잘라 기억하면 되었으므로 당시 어렵지 않게, 아니 흥미로움으로 외울 수 있었으며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이보다도 더 오래전 어언 60여 년이 되어오는 중학 입학시험을 보던 때의 수험번호 '169'도 애써 생각해보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숫자다. 3년 뒤의 고등학교 입학 때도 당연히 수험번호가 있었겠지만, 그랬는지 조차 전혀 깜깜한 반면 중학교 수험번호가 잊히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6.25 사변은 나에게 선대의 고향에서 시골 삶이 어떤가를 맛볼 기회가 되었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여의 그곳 생활은 어투나 억양을 비롯하여 촌놈으로의 모양새를 자연스럽게 갖추는 데 넉넉한 세월이었다. 도무지 전쟁이 있기나 하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향촌에 머무르다 번잡한 서울로 갓 올라왔을 때, 나는 보나 마나 잔뜩 주눅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입학시험을 치르는 중대사를 앞두고 앞니 하나가 빠질 태세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시때때로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더욱이 시험 당일에는 흔들림 폭이 점점 커져 잡아채면 곧 빠질 듯하면서 여의치 않아 시험지를 받아놓고도 그놈의 이빨을 앞뒤로 제쳐보는 딴짓을 하게 되었다. 승강이 끝에 결국 뽑아내고 나서야 문제지를 제대로 대하다 보니 그때는 이미 시간이 꽤 흐른 듯하여 답안지 작성에 많이 허둥대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불편한 이를 빼낸 기분은 더없이 홀가분하였지만 그렇다고 시험을 치른 뒤끝은 왠지 개운치 않았다.
역시 그날밤 잠자리에서 답안지에 수험번호와 이름을 쓰지 않고 문제 풀기에 급급했었다는 생각이 벼락같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시험을 잘못 본 것보다 더 기막힌 사고를 쳤음이 틀림없으니 순간 낙담의 신음이 터져 나왔으며 그 소리는 옆에서 잠들었던 삼촌을 깨우기 충분할 만큼 컸던 모양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삼촌의 말은 우선 나를 안심시키는 의도가 다분하였겠지만 진정으로 크게 우려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버지 대의 동기간 중에 막내인 삼촌은 나와 12살 위 띠동갑으로 문리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중앙학교에는 문리대를 나와 교직에 있던 동년배들이 즐비하여 천만다행으로 일찍이 떠올렸으니 사정에 앞서 이러한 형편을 자진 신고하고 청원하면 이 정도는 참작될 만한 것이니 거듭 상심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다음날 수험생들은 다시 학교에 모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신체검사를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좌우간 이 자리에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얼굴 큰 선생이 위엄이 꽉 찬 목소리로 169번을 불러 제켰으며 죄인처럼 나타난 나의 뺨을 다짜고짜 틀어쥐고 교무실로 끌고 갔다. 꽉 잡힌 볼때기가 꽤나 아팠으련만 그 생각보다는 희망의 빛이 보인다는 안도감이 뒤따랐던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로 잘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중학과 고교에서 때때로 수학을 지도했던 방창모 선생님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겪고 나서 결국 중앙 배지를 달고 중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 이 학교가 보통의 학교가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중앙의 전신은 기호학교로 나라의 운명이 존망의 위기에 있을 때 전국 각지의 민족 선각자들이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정신으로 설립되었다는 것. 이 뜻에 부응하듯 3.1 운동을 모의한 곳이 중앙학교 숙직실이었으며 순종황제의 장례식이 있던 1936년 6월 10일 이른바 6.10 만세사건을 주도한 이들이 이 학교 학생이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들으며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중앙 배지를 달고 다녔다. 중앙학생이 된 것에 대한 자긍심과 학교에 대한 사랑이 더욱 돈독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3년 뒤 고등학교 진학철이 되자 중앙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할지도 모를 위기가 또다시 닥쳤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 내가 학교 선생이 제격이라는 소신을 지니고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사범학교에 응시해 보라는 당부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교사라는 직업은 내 갈 길이 아니라는 꿋꿋한 마음보다는 중앙에 대한 애착은 물론 거의 모든 친구들이 동계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당연시하는데 혼자 외톨이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전기 후기로 나눠 시행하던 당시 입학전형제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사범학교는 필기시험을 전기에 앞서 특차로 치르게 되어서 갈 것인가 마느냐는 나중에 결정하더라도 응시는 해볼 수 있었으므로 그것까지 거부하며 일찍이 아버지와 정면 충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결정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 오래가지 않았던 것은 필기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며 음악 체육 등 실기 테스트로 잡힌 일자가 전기고사일과 겹치게 고지되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나는 사범학교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사 표시로, 체육도 그렇지만 노래로 치를 음악이 특히 자신 없음을 강하게 내세웠다. 내가 부르는 노래 솜씨가 엉망인 것은 다행히 아버지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권으로 따지면 차순위 또는 차차순위가 되겠지만 내 뜻을 존중해주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와 삼촌의 막강한 지원이 뒤에 있다는 것은 든든한 방패막이었다. 전기 필기시험과 사범학교의 실기 테스트가 겹쳐 있는 날 아침 한 몸으로 두 곳은 도저히 나눠갈 수 없으니, 이제는 어쨌든 최종 담판을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고 긴급 가족회의(?) 결과는 가깝지만 생소하여 신경 써 찾아가야 하는 왕십리가 아닌 3년 동안 다니며 길들어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계동으로 시험 보러 가는 쪽으로 낙착되었다. 삼촌의 의견과 입김이 강한 힘을 발휘했을 터이니 나는 살아가면서 고비마다 삼촌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일제강점기 나라가 망할 어수선한 시기에 태동하여 민족사학으로서 빛나는 전통을 이어온 우리 학교가 최근 연고지 추첨 입학제로 바뀌고 시민들의 중심 생활권이 강남으로 이동하며 우수 학생 선발이 어려워지자 학교 입지 또한 크게 위축되며 그동안 쌓아 올린 명예가 실추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지정되었으니 이것이 중앙 중흥의 발판이 될 것으로 믿으며 앞으로의 백 년을 기대해 본다.
5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중앙에 다니던 학창 시절을 추억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려보니 갑자기 계산 아래 교정이 그립고 가보고 싶다. 길고 길었던 계동 골목, 비 올 때나 해동 무렵이면 예외 없이 질척이는 진흙탕을 요리조리 피하며 걸어야 했던 길, 중간쯤 위치한 학생서점 진열대 앞에 멈춰 새로 나온 '학원'을 펼쳐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킬킬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얼른 읽고 곧 다음 달 호가 나오기를 고대하던 일 등을 되새기며 골목길의 맨 위, 6년을 눈이 오나 비가 뿌리나 한결같이 다니며 정을 들인 늠름한 본관 건물을 설렘으로 마주해보고 싶은 마음이다.(20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