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월송정에서 부석사까지
「6시 모닝콜, 7시 식사, 8시 출발. 이틀 연속 늙은이들을 강행군으로 잡아 돌리는 것 아닌가. 서울에서 출발하던 첫날은 더 일찍부터 법석을 피우지 않았던가. 새벽잠이 없을 노년기라지만 서너 시에 깨어 한참 뒤척이다가 6,7시에는 느른해진 몸을 다시 쉬어줘야 할 때 아닌가.」
내 목소리가 아니다. 혹시 이런 행복한 불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것일 뿐이다. 우리 부부는 짧은 시간이지만 호텔부근 산책로를 따라서 숲이 있는 언덕에 올라 어둠 속 나뭇가지에 싸늘하게 걸려있는 둥근 달도 보았고 동쪽 하늘 저편에 검붉게 터오는 먼동을 온몸으로 느끼기도 했다. 좀 더 기다리면 일출도 가능할 것이지만 촉박한 시간에 한 번 더 온천을 하려고 내려왔다.
백암 온천물은 대체로 좋다는 평가다. 부근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물건은 모두 가짜여도 온천물만은 진짜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온천물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통상적으로 류머티즘 관절염 피부병 등에 좋다하고 어딘가는 미용은 물론 정력(이 부분은 캐묻지 마시라. 어딘지는 생각나지 않는다)에 좋다고 자랑하지만 매직처럼 그렇게 효험을 본 적이 있는가. 좋고 아니고의 판단은 ‘느낌’이 아닐까? 담그고 있을 때의 푸근함, 욕 후 매끄러운 피부의 촉감, 거울에 비친 벗은 몸의 뽀얗게 핀 듯한 느낌.
출발을 앞둔 버스 안은 정말 빛을 발하듯 환한 느낌이 들었다. 좀 더 밝은 빛을 내는 측은 나처럼 전날 밤과 오늘 아침 두 차례의 온천욕으로 밑천을 뽑은 사람일 것이다. 칼 같던 시간 지킴이 조금씩 무뎌지자 김회장은 급기야 「우리는 18회니까 18분까지는 괜찮다」고 묵인 아닌 공언을 하게 되고 이후 정시 출발은 18분 일찍 서두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관동팔경의 막내 월송정(越松亭 안내판에는 제1경이라 씌어있다) 현판은 최규하 대통령 글씨로 힘차고 잘 쓴 필체다. 짧은 재임기간(1979-80) 중에도 대통령 직함으로 글을 남길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소나무밭을 지나 2층 구조의 정자에 도달했고 대부분은 정자를 넘어 모래를 밟으며 해변으로 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몸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쪼그려 앉아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는 김성태와 김성수 동문 뒷모습은 천진하며 때 없는 아이들 자태 그대로다. 그러나 발을 벗고 물로 뛰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월송정아 잘있거라 하고 망양정을 향한 길은 해안도로여서 주로 바다를 끼고 달린다. 옆에 앉은 김회장이 동쪽 먼 곳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저 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그것은 “바다”라고 자답한다. 그렇다. 적군처럼 겹겹이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있는 지척의 바다도 바다지만 까마득히 먼, 보일 듯 말 듯한 수평선의 바다도 바다다. 동해의 바다는 오직 출렁이는 물과 가끔 끼룩거리며 짧은 비상을 하다 어디에고 내려앉아 나래를 쉬는 갈매기가 있을 뿐이다. 그런 단순한 바다, 침묵의 바다가 잔잔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글과 그림으로 찬했듯이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월송정보다 한결 좋아 보인다. 망양정을 노래한 시인 속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며 많은 가사를 남긴 정철(鄭澈 1536-93)이 있지만 숙종(1674-1720) 정조(1776-1800) 임금도 포함되고 그림으로 표현한 묵객에는 겸재(謙齋 1676-1759)가 있고 풍속화가 단원(檀園 1745-?)도 한 몫 끼어 그린 망양정도가 있다. 특히 숙종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關東第一樓」라는 친필현판을 하사했다고 한다. 루 안에 걸린 많은 글들 내용이 심히 궁금하지만 일찍이 공부가 짧아 내 실력으로 해득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1860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였다면 이들이 좋아했던 공간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망양정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한 풍광 좋은 바다를 관망하는 곳이라는 개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2004년 첫 문화기행 때는 불영계곡을 오른편으로 두고 36번 도로를 빠져나와 이곳에서 동해를 따라 북상했는데 이번에는 남쪽으로부터 올라와 여기를 기점으로 불영계곡을 좌측으로 보며 거슬러 들어가야 하니 망양정은 ‘2004 문화기행’과 ‘2009 가을기행’을 접합하는 장소가 되는 셈이다.
어떤 팸플릿은 불영계곡을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심하게 부풀려 일컫고 있는데 사실 차를 타고 지나며 보려면 아무리 목을 길게 뽑아도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찾아보기 어렵다. 뻔한 말이지만 잘 보이는 데 서서 봐야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곳으로 탐방객의 편의를 위하여 마련된 정자형의 전망대 선유정과 불영정이 있다. 이중 한 곳에 멈춰 둘러보기도 했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불영사까지 내려갔으니 이번에 불영계곡은 제대로 본 것이다. 불영사와 함께 불영(佛影)이란 용어가 생긴 사유도 알게 되었으니 일거삼득의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고나 할까.
서쪽 높다란 산등성이 까마득한 곳에 부처님 모양을 한 바위가 하나 서있는데 절 앞 너른 못에 산과 함께 고스란히 비출 때면 그 모습 또한 부처님과 흡사하다. 수면이 잔잔하면 뚜렷하고 바람이 불어 잔물결이 일면 사라지고 만다. 하필 내가 당도할 때 잘 있던 모양이 흩어지기라도 할라치면 전생에 무슨 과가 있어서 이런 업을 당하는 게 아닐까 얼굴 붉어지게 된다.
불영사를 출발하여 부석사 부근 오찬 장소로 가자면 태백산맥의 높은 재를 넘어 2시간은 족하게 잡아야 한다. 이 기나긴 시간을 밍밍한 산만 바라보며 지루함을 견디며 갈 것인가.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조규향 동문은 대학총장이지만 교육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라는 신조를 보여주듯 발칙하지만 똘똘한 아이에 관한 조크를 두어 가지 들려주며 막을 열었고, 문화해설사 김유원 동문은 좀 전에 불영사에서 본 개나리꽃같이 가을에 피는 봄꽃은 ‘철부지’요, 억새와 갈대가 달 밝은 밤 사랑을 속삭여 만든 것이 ‘잡새’라는 등 식물학의 특수 분야에도 일가견 있음을 과시했다. 김회장은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다소 어물어물하는 기색이었지만 어느 고승의 그것보다 낭랑한 목소리와 톤으로 꽤 길게 끄는 염불을 외어 중생인 우리들 앞날의 행복과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하기도 했다. 유효봉 동문은 B팀장 박동섭 동문으로부터 건네받았다는 꽤 많은 양의 빙고문제지를 숨 쉴 새 없이 돌려 여가선용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도 남는 시간은 박양한 팀장이 깨소금 같은 양념의 말로 때우다 보니 어느새 오찬장소 ‘자미가’ 앞 주차장이었다.
계곡 깊숙이 들어갔다가 헤어 나오고 높은 재를 비록 차를 타고이지만 숨 가쁘게 오르고 하며 끼니때도 약간 늦어진 것이 일조가 되었는지 산채정식 오찬은 특별한 맛이 있었으며 마침 생일을 맞은 김중웅 동문에게 ‘건배!’를 하기도 했다.
애초에 김유원 동문은 부석사 탐방이 불국사와 함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했다. 그런 곳을 고재천 총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므로 부석사 방문을 원치 않는 동문은 주차장 부근에서 쉬어도 좋다」고 안내문에 주를 달았지만 그렇게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부석사로 오르는 길.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별 거 아니라고 호언으로 많은 참여를 종용했지만 그런 나로서도 수년 전에 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더욱이 식사 직후이니 무거워진 몸을 옮겨야 하는 부담이 만만치 않다. 유홍준은 남한 땅의 5대 명찰을 거명하고 그 특징을 논하며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 쬐는 듯한 절」이 영풍 부석사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라고 했다.
통상 고찰(古刹)이면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노거수가 주변에 별로 보이지 않아도 부석사는 충분히 아름다우며, 무량수전 안양루 등 주요 건물들은 단청이 없음으로 해서 화려함 대신 단아한 미가 돋보인다.
부석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를 무량수전으로 꼽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고 배워 직접 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름을 익히 알고 있던 곳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김유원 동문은 많은 것을 설명했지만 이번에는 「배흘림」과 「귀솟음」「안쏠림」 세 가지만이라도 꼭 기억해두자고 혼자마음으로 다짐한다. 불교신자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무량수전 안 아미타불 전에 많은 동문들과 가족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무엇을 빌려서가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서 그러는 분위기였다.
부석사에는 떠있는 바위 부석(浮石)과 중국아가씨 선묘와 의상에 에 얽힌 일화, 의상대사 지팡이가 뿌리 내려 살아났다는 선비화(禪扉花 학명 골람초)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장황하므로 읽고 또 읽어도 싫지 않은 혜곡 최순우 선생의 명문을 인용하며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부석사 꼼꼼히 살펴보기를 끝으로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집집마다 맛좋은 사과 한 상자씩 품고 귀가 길에 오른 차중에서 노철호 동문이 ‘흉노(匈奴)의 흥망’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들려줄 때, 풀기 어려운 의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은 무엇인가?」 단군신화나 박혁거세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그대로 믿는 성인(成人)이 과연 있을까. 우리의 조상은 태초에 어디서 와서 그 후손들은 지금 월드컵관광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