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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은 다 어디에(1)

by 김헌삼


아주 오랜 기억들


내가 기억하는 오랜 일들을 떠올리고 이 중에서 아주 오래된 것, 내가 가장 어렸을 때의 일은 무엇인가 더듬어 볼 때가 가끔 있다.

가장 어렸을 적 기억은 어머니 등에 업힌 나를 몇 발짝 떨어진 돌담 뒤에 숨어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환하게 웃음 띤 표정으로 어르는 것 같던 이모의 모습이다. 이 막연한 장면은 어머니가 후에 말해 주셨다고 기억한다.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때가 두세 살 무렵으로 많은 것을 보고 울고 웃으며 감정 표현을 했을 텐데 하필이면 평범한 이 장면이 왜 뇌리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기억 하나를 빼먹을 뻔했다. 나에게는 세 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하늘나라로 갔다 한다. 그 주검을 놓고 외갓집 어둑한 윗방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던 모습이다. 내 성장 과정에 닥친 여러 어려움을 혼자 삭힐 때마다 몇 살 차이 안 되는 이 여동생이 살아 같이 있었으면 동고동락하며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또 자주 있었던 추억은 어른들이 데리고 다니다가 기차역 역사 부근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홀로 두고, 꼼짝 말고 기다리라 다짐하며 볼일 보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움직이기는커녕 세워놓은 위치를 과연 잊지 않고 돌아와 줄지가 걱정되었던 소심한 마음이다. 아마 차표를 사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잠깐의 시간이었겠지만 그 짧은 동안을 불안한 마음으로 길게 느끼고는 했다. 요즈음 TV에서 가끔 이산가족들의 헤어지게 된 동기를 들으면 이런 식으로 잠깐 떨어진 사이에 찾지 못하고 그렇게 기나긴 시간이 흐른 경우를 보게 된다. 그 걱정이 어린 마음의 기우만도 아닌 듯하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무엇이든 구경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어른들이 따돌리고 살짝 다니나 호시탐탐 했고 어른들은 데려가봤자 곧 잠들어버린다고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어렵사리 끼어가서 본 어떤 국극(國劇)의 한 컷은 아직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몇 명의 악한 군사(?)들이 한 선량한 사내를 기둥에 묶고 천으로 가린 눈앞에 벌겋게 달군 쇠를 갖다 대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졸음을 확 달아나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 천안역에서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를 다녀오던 길인지 역전 광장 한 편에서 외할머니와 할머니가 헤어지게 되었는데 두 분이 서로 나를 차지하여 데려가려는 사전 꼬임이 대단했었다. 말린 오징어를 들고 손짓하는 할머니, 엿을 보여주며 은근히 유혹하는 외할머니, 그때 누구를 따라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어느 것을 더 좋아했던 가와는 관계없이 외할머니한테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은 지금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식구 중에서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외할머니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지만 예산 숙모가 갓 시집왔을 때 친정집이 그리우면 나를 이용했다는 말씀을 가끔 하신다. 예산에서 인천으로 열아홉 살에 시집이라고 왔는데, 사는 형편은 친정보다 더한 게 없고, 그렇지 않아도 멀리 두고 떠나온 부모 형제가 그립고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고 하셨다. 그냥 놔둬도 뒤뚱거리며 잘 노는 나를 향해 손짓하면 좋다고 달려가 업히고, 작은어머니는 업기가 무섭게 수도국(水道局) 산 옆 똥고개 위로 단숨에 달려가고는 했다.

고개 위에 올라서면 뒤편 저 멀리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바다에 연하여 방직공장, 차량공장, 아루미(알루미늄) 공장 등이 꽉 들어차 있는 사이로 기차가 흰 연기를 뿜어내며 꽤액! 한바탕 소리를 질러대고 달려 나간다. 몸은 고개 위에 서 있어도 마음은 어느새 붕 떠서 기차에 실려 친정으로 내닫는 환상에 빠져들며 기분이 풀리곤 했다는 이야기. 몇 년을 우리와 함께 살다 결국은 친정 부근으로 분가하여 이제는 그곳을 홀로 지키신다. 이 이야기를 팔순이 다 되어서도 어린 새댁의 마음으로 가끔 하셨다. 이 격정의 순간에도 영문 모르는 나는 따스한 등이 좋아 아늑한 잠에 빠져들곤 했을 것이다.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고 그것이 언제였는지 시기를 가늠하지 못할 만큼 막연한 기억들은 내가 태어난 1941년부터 1948년까지 해방 전후 어느 때 있었던 일들이다. 학교에 입학한 뒤의 일들은 좀 더 성장했을 때이기도 하지만 학년과 맞물려 연대 구분이 뚜렷하다.

1948년 4월 어느 날, 세는 나이로 여덟 살에 막내 삼촌 손에 이끌려 자랑스러운 학교생활의 첫발을 내딛는다. 코흘리개 손수건을 웃옷 앞자락에 이름표와 함께 차고 열을 맞추기 위하여 ‘앞으로 나라니!’‘바로’ 구령에 따라 움직이며 연신 재잘대는 병아리들 속에 휩쓸린다. 젊고 살짝 곰보가 더 예쁜 담임선생과 1학년 4반 학생들이 함께 찍은 ‘학교생활의 첫해!’ 사진이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처음으로 찍은 사진을 받아 들고 오자마자 식구들도 서로 먼저 보겠다고 뺏고 놓지 않으려 하는 통에 한쪽 귀퉁이가 떨어졌다. 그것이 한동안 얼마나 속상했던지. 그러나 지금은 찢어진 쪽을 감쪽같이 붙이려 애쓰며 심술부리는 나를 달래려던 고모, 삼촌, 할머니 등의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음 짓는다.

3학년 초 6.25가 발발할 때까지 내 머리는 미숙한 상태였던 것 같다. 2학년 구구단을 외우는데 혼동이 되어 한참 애먹었던 기억이고 그렇게 처지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학교성적이 우수한 아이들 무리에서 빠졌던 것이 지금 기억으로 확실하다. 그래도 학기가 시작되고 두 달이 넘게도 산수 교과서는 받지 못한 채 피란길에 오르게 된 것은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받을 것을 깨끗하게 포기한 몇 가지 중의 하나이다.

학교 들어가자마자 약삭빠르지 못한 행동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 어렵게 사는 중에도 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생전 처음 운동화를 신고 학생 모자를 쓰고 다니게 되었다. 몇 번의 주의를 받았음에도 뒤축을 자주 꺾어 신고 다녀 쉬이 망가지게 했다고 운동화는 단 한 번 신어 본 것으로 끝났다.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검정 고무신만 신어야 했다. 저학년은 오전 오후 2부제였고, 수업 중 모자는 뒤쪽 벽에 열 지어 박아 놓은 못걸이에 걸게 되었는데 학교에 다닌 지 얼마 안 되어서 돌아올 때 쓰고 오는 것을 깜빡했다. 이것을 시집 안 간 고모가 보고 "모자 어떻게 했니?" 하고 지적해 줬음에도 다소 거리가 있는 학교에 되돌아가기가 귀찮아 다음날 가서 찾아 쓰겠다고 미뤘다. 그러나 이튿날 나의 새 모자는 없어지고 대신 낡고 낯선 것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반에서 공부한 다른 학년 아이가 바꿔 쓰고 갔을 것이다. 그 낡은 남의 모자를 그대로 쓰고 다녔는지 어쨌는지 모자 구경도 중학생이 될 때까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2학년 때는 방학 내내 판판 놀다 방학 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아 뚱뚱하고 밉상인 여자 담임선생에게 정수리 부분 머리를 가위로 깎이는 수모를 당하는 두세 명의 학생들 사이에 끼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방학공부’에 나오는 문제들은 교과과정과 수준은 같다고 해도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응용력 없이는 답을 찾아 적기가 까다로웠다. 그림을 보고 거기에 맞는 노랫말을 적어 넣으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통 무엇인지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끙끙 앓다가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더니 순순히 종이쪽지에 흘림글씨로 새까맣게 적어주시는 것이었다. 그것을 그리다시피 옮겨 적어 개학 후에 내기는 했지만 후에 생각하니 아버지가 적은 것은 유행가 가사였던 것 같았다. 문제의 그림은 학교 앞에서 선생님이 종을 치고 아이들이 그곳을 향하여 모여드는 모습으로 누가 봐도 ‘학교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이자.’로 시작되는 입학 하여 배우는 노래 중의 하나인 ‘학교종’이었던 것이다. 이런 간단한 답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나는 어리바리한 아이였고, 여러 가지로 처져 저학년을 지내다가 6.25 전쟁을 맞게 되었다.

월요일 아침, 하루 쉬고 새로운 기분으로 학교에 가자마자 교장 선생님의 피란 가라는 낯선 말을 듣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가 이틀 후인가 할머니와 아버지는 더 사태의 진전을 보아가며 뜨기로 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남부여대한 가운데 피란길에 나섰다. 어린 나는 수통 하나 달랑 메고 여름날 늦은 소풍 가는 차림으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 과정은 덥고 머나먼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어느 집 부엌 바닥에 얻어 자기도 하고 천안이라 짐작되는 역사 객실에서 빽빽하게 들어찬 낯선 많은 사람과 피란 열차를 타기 위하여 막연한 기다림 속에 끼어있기도 했다. 6.25는 우리 민족의 큰 비극이었고 힘든 피란길을 가야 했지만 나는 오히려 어리벙벙하게 지내던 시절의 마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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