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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10)

by 김헌삼

12월 산을 오르며


12월의 산들은 연중 가장 삭막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다.

소나무, 전나무, 노간주나무 등 몇몇 늘 푸른 나무를 제외한 수목들은 잎을 모두 떨군 채 알몸이 되어 서 있고 지상에 널려 뒹구는 나뭇잎들은 한 가닥의 바람결에도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하늘은 잿빛이기 일쑤이고 산색 또한 우중충해 있는 날이 많다. 이때 산을 오르며 우리가 갖는 감회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고독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외로움의 뼈저린 맛을 느끼게 하고, 동행하는 연인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 사랑의 깊이를 더더욱 절감케 하는 것, 이것은 삭막한 자연이 우리에게 특별히 안기는 마력일 것이다.

스산함이 가득한 이때 뜻밖에 눈이라도 내린다면, 은근히 기다리던 첫눈을 마침 산중에서 맞는다면 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까. 편편이 나풀나풀 춤추며 내리는 모습은 어디엔가 자리 잡아 안식의 순간을 채 가져보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말 운명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설(降雪) 그 자체로서 파격이요, 환희이다. 대부분 기대로서 끝나버리는 것이지만 이러한 기대라도 품어볼 수 있으므로 12월의 산은 삭막한 가운데 푸근함도 가져볼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해던가, 한 20여 년 전쯤의 일로 기억된다. 산속에서 첫눈을 맞은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이 있다. 그날은 많은 사람이 치악산을, 중앙선의 똬리굴 방향에서 오르고 있었다. 긴 골짜기 길을 화전민의 외딴 너와집 농가도 지나치고, 너른 억새밭을 헤치면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스산함도 맛보며 상원사까지 올라가 치악산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보은 전설을 떠올려보기도 했었다. 그때가 올라가고 있을 때였는지 하산할 무렵이었는지 지금에 와서 기억은 확실치 않다.

“눈 오잖아?!” 하는 누군가의 감탄 어린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고, 주위를 살피니 눈발이 간혹 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눈은 무심결에도 눈에 띄게 잦아져서 어느새 쌓여가고 있었다. 이날 산을 찾은 일행들은 하나같이 횡재를 만난 사람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되었고, 고즈넉하던 산중이 환호성으로 떠들썩해졌다. 길은 곧바로 미끄러워져 아무런 사전준비가 없었던 일행들은 자칫하면 넘어지며 가까이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몸을 가누려 버텨보기도 하였다. 대단한 새침데기 아가씨도 이때만은 잡아주는 남정네의 손길이라 하여 마다할 경황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느새 빙판이 된 길 위에서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아무리 서둘러 하산하려 해도 그것은 마음일 뿐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걸렸다. 산간은 곧 어두워졌으나 새로이 쌓인 눈의 반사광에 의하여 더듬더듬 꽤 늦은 시각에라도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신없이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일행 중 하나가 빠진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은, 첫눈을 맞은 좋은 추억과 함께 두고두고 후회되는 가슴 아픈 과오(過誤)로 남아있다.

4 반세기 동안 틈틈이 다닌 산행에 오직 한번 산중에서 맞은 첫눈의 기억. 그러나 초겨울 산행에서는 으레 ‘첫눈을 맞게 되려나?’ 하는 기대심리가 있다. 언제 꽃대가 피어올라 고귀한 향내를 풍겨줄지 막연하여도, 정성껏 난을 키우고 소중히 가꾸며 그날이 오기 기다리는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다.

앙상한 가지, 우중충해 보이는 나무 끝에도 어느 봄날 온화한 기온이 감돌며 꽃은 화사하게 피었었다. 그래서 앞으로 돌아올 춘절에도 틀림없이 반복될 것임을 상상하며 나름대로 신록, 녹음, 단풍의 옷들을 차례차례 갈아입혀 그 모습을 그려본다. 지금은 비록 앙상하고 우중충하고 삭막하여 허허롭지만, 화사하고 새롭고 풍요롭던 호시절이 있었음을 또 앞으로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 그렇게 허전하고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생성되어 하나의 완성체로서 존재를 누리다가 풍화되고 소멸해 바람같이 사라지지만 다음 세대에 의하여 계승되는 것이 산의 모습을 치장하고 있는 나뭇잎뿐이겠는가. 이에 비하면 우리 일생은 그 주기가 좀 길다는 차이가 있을 뿐 호머의 시 한 구절이 시사하는 것처럼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이잖은 가.

우주 공간의 만물은 숱한 생성, 성장, 완성, 퇴화, 소멸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변화와 발전을 수반하며 항존(恒存)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 하나만 콕 집어 내보면 극히 미미한 존재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렇게 미천한 것들이 무수히 모이고 쌓여서 삼라만상이 이뤄졌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는 자부심도 있다. 공중에서 급속히 모양을 이뤄 낙하하기까지 잠시 현존하였던 설 편(雪片)들이지만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환희를 선사하지 않았던가.

초겨울의 산행은, 줄기차게 움직이므로 달아오르는 몸의 열기를 대기의 한랭한 기온이 식혀주어서 잘 조절되고, 밟히는 지면은 쌓인 낙엽의 부드러움으로 걷는 기분이 어느 때보다 쾌적하다. 그래선지 산행 중에 이렇게 소소한 생각의 단편(斷片)들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인가 보다.

이제 하산을 마치고 대처(大處)에 도달하면 달궈진 몸이 식기 전에 따끈한 온천수로 산행의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내고 귀가하는 차 안에 편안히 기대앉아 저물어가는 한 해를 돌이켜보기도 하고 또한 산뜻한 기분으로 다가올 새해 설계도 해야겠다.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 때까지는. (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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