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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11)

by 김헌삼

호젓한 광덕산


우리가 주관하여 산행길에 오를 때는 먼 곳이 아니더라도 일찍 서두른다. 이른 만큼 하루를 길게 활용할 수 있고 또 사람들로 붐비지 않을 때 움직이므로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서울고속터미널에서 아침 7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탄 지 꼭 한 시간 만에 천안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천안에서 갈아탄 광덕사행 시내버스가 40여 분 걸려 종점에 닿았을 때는 마치 전세라도 낸 것처럼 승객은 우리 일행 6명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때부터 오늘의 산행은 지극히 호젓할 것이란 예감이었다.

아침 10시가 채 못 된 시각이었으나 따사로운 햇살이 웬만큼은 퍼져있어 칩거하던 주민들도 슬슬 나돌기 시작할 때가 된 듯한데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우리와 함께 내린 버스의 운전기사와 안내원뿐이니 도대체 이곳이 사람 사는 마을인가 싶다. 부근 매점도 열려있는 듯하나 주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광덕사 일주문은 버스 종점에서 조금 오르니 나타났으며 이 절은 1974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신축건물답게 깨끗하고 아담하였으나 대신 고풍(古風)스러운 맛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경내를 두루 돌아보는 동안 인기척조차 없는 허허로움을 대웅전 부처님의 그윽한 눈길이 다소 누그러뜨려 주었다.

광덕사를 오른쪽으로 두고 계곡을 따라 오르는 수레길 가에 ‘등산로’라는 푯말이 있어 자신 놓고 길을 잡을 수 있었다. 1월 중순이면 꽁꽁 얼어있어야 할 작은 계곡에 그지없이 맑고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절을 벗어나 약 2백 미터쯤 올랐을 때 함석지붕 빈 농가가 나타났고, 농가를 벗어나 산모퉁이를 돌고 나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왼쪽으로 빠져 계곡을 건너가게 되었으며 여기부터 본격적인 산길에 들어선 듯하였다.

산비탈은 점차 가파르고 얼어붙은 잔설 길이 아이젠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라도 꽤 미끄럽다. 산자락에는 호두나무가 유난히 많아 호두과자를 천안 명물로 만들어낸 연유를 알만하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발길이 높은 곳으로 옮길수록 띄엄띄엄 서 있는 소나무를 빼고는 온통 떡갈나무류가 산을 덮고 있다. 덩치는 작아도 코르크질이 좋은 굴참나무가 주종이나 그 밖에도 수많은 초목이 자라고 있어서 그 이름을 뚜렷하게 알만한 것은 몇 안 되며 그나마 확연하게 구분되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유감이다. 자연과 생태에 관한 책자가 일반교양서적으로 다양하게 널리 보급되어 있었더라면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이렇게 깜깜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산릉은 바위가 거의 없어 아기자기하고 오묘함은 없더라도 소의 등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서는 안내가 비교적 친절하여 1 천오백 미터 지점부터 시작하여 정상까지 남은 거리 가늠이 가능하도록 2,3백 간격으로 이정표가 세워있다. 그러나 산길은 짬을 주지 않고 계속 급하게 올려 붙으니 일행의 거친 숨결을 진정시킬 겨를이 없다.

지도상으로는 천안과 온양 부근에 무슨 갈만한 산이 있을까 싶었는데 높이 오를수록 남쪽으로의 조망은 완만해도 유장한 산세가 첩첩하다. 이것이 차령산맥의 한 줄기란다.

광덕사를 출발하여 두어 번 쉬고 1시간 반 만에 광덕산(廣德山) 정상에 도달하였다. 정상에 머무름은 오르고 내리는 기나긴 과정의 분기점이자 정점으로서, 극히 짧은 동안이라도 정상을 밟고 나야 그 산을 제대로 다녀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산행심리이다. 그래서 산행목표는 대부분 산꼭대기이기 마련이다.

해발 699미터의 정상은 약 50평 정도의 비교적 넓고 편편하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둘러보니 광덕사는 깊은 골 아래에 숨어있는 모습이고 남쪽의 겹겹 산줄기와 서쪽 멀리는 송악저수지를 포함하여 조용한 들판과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있다.

정상까지의 길 안내가 충실하였던 것에 비하면 정상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게 이상하다. 삼각점이라도 없었으면 정상인지조차 의심스러울 뻔했다.

동북쪽 하산 길로 하여 떡갈나무가 빽빽한 능선을 타고 약 2백 미터쯤 아래 안부에서 여러 개의 산악회 리본이 북쪽으로 갈라진 내림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길로 잠시 따라가니 깨끗한 옹달샘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부터 진로가 애매하다. 아까 갈림길에서 내려올 때부터 거치기로 계획한 장군바위 쪽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예감이었으나 확실치 않았으므로 중의에 밀려 따랐다.

어디로 방향을 정해야 할지 진로조차 막연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사방으로부터 적에게 쫓기는 군마처럼 이리 몰렸다가 저리 돌아서곤 하였으며, 그러는 사이에 한 귀인(貴人)을 만나게 되었다. 나이 지긋해 보이고 풍채 당당한 그 사람은 우리가 전혀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방향에서 마치 안갯속에서 솟아나는 신선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이 산에서 만난 최초의 등산객이었으며 우리의 하산 길을 터준 사람이었다.

다져진 눈길이 얼어붙어 몹시 미끄러웠으므로 여간 조심하지 않았다가는 뒹굴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다 싶다. 언제 쌓인 눈인지는 모르지만 남면은 모두 녹다시피 했는데 이쪽 북풍받이는 바닥 눈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러한 차이가 생태계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듯, 전문가적 안목으로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아니지만 북쪽 능선은 남쪽과 비교하여 들어선 나무들 종류가 다양한 양상이다.

산을 다 내려와서 한적한 민가 옆에 식사하기 아늑한 장소가 있었다. 이때의 시각이 12시 반쯤 되었으니 산을 넘어오며 걸린 시간이 모두 2시간 반가량으로서 성에 안 차는 감이 든다. 식사를 마치고 산 밑 버스정류장에 이르니 2시 버스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 다음 차는 5시 반 경에나 있다 하니 어쩔 수 없이 평촌리 송남초등학교 앞까지 걸어 나가야 한다. 40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서 온양행 버스는 얼마든지 있었고, 온양에서 온천물이 제일 좋다는 신천탕을 찾아 오늘의 피로를 씻어내고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맡기니 세상 편한 느낌이다.

차 중에서 오늘의 산행을 정리하니 비록 산세는 험하지 않고 산행시간은 짧았으나 산이 깨끗하고 찾는 사람이 드물어 모처럼의 한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이 코스는 호젓함 속에서 뿌듯한 정을 나누려는 연인들, 가까운 친구들에게 아주 적절한 곳으로 생각되는 산이었다.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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