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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12)

by 김헌삼

월출산에서 일출도 보고



산들은, 평지보다 높이 솟은 땅덩이 위에 초목과 암석이 어우러져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각각 유현(幽玄)한 계곡, 아기자기한 오솔길이나 암릉, 꿈결같이 펼쳐진 진달래나 철쭉의 화원, 환상적인 억새 능선, 전망 좋은 정상 등 산마다 제각각의 특징이 있어서 멀리 있는 산을 큰맘 먹고 찾아갈 때는 이러한 특색이 계절에 맞춰 두드러질 때를 선택하게 마련이다.

내가 91년 2월 말경 무박 2일의 월출산(月出山 809m) 산행에 참여할 때는 이 산에서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아름다움 2가지를 염두에 두었었다. 밤새 달려 새벽어둠이 아직 온전할 때 현지에 도착하면 음영 짙은 암봉의 수려한 능선 위로 걸린 달의 해맑은 모습과 온 누리를 우윳빛으로 감싸는 듯한 달빛을 보고자 한 것이 첫 번째 바람이었고, 또 하나의 희망은 산자락 잔설 사이에 피어있을 짙붉은 동백꽃의 농염한 자태를 가까이 보는 즐거움이었다.

산세는 만고불변이되 산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풍취(風趣)는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변만화하여 그 산이 독특하게 갖는 대표적인 미관(美觀)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을 시기에 맞춰 내가 거기 함께 있거나, 현장에 머무를 때 마침 그 장면이 연출되는 행운을 잡아야만 참관이 가능한 것이다.

무박이란 잠을 잘 시간에 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므로 앉은자리에서 눈을 붙이며 잠을 청할 수는 있으나 편안한 잠은 오지 않는, 말하자면 가수 상태로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피곤한 나들이이다. 그렇지만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하루라는 넉넉지 않은 통상의 주말에 장거리 산행을 계획하기에는 아주 효과적이어서 평소 체력을 충분히 비축했다가 가끔은 써보는 산행방법이다.

우리가 밤길을 가르며 도둑고양이들처럼 월출산 산행기점으로 잡은 도갑사(道岬寺) 입구에 잠입한 것은 출발한 지 5시간 반 만인 새벽 3시 반 경이었다. 도착해서도 차 안에서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버스에서 내려 어슬렁어슬렁 산 쪽으로 향했다. 앞길은 검은 장막 같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틔어있을 뿐이었고 그곳을 길이라 짐작하고 따라 오르는 것이었다. 임립(林立)한 나무들, 그 가지의 윤곽 사이로 빤히 올려 보이는 차디찬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였으나 기대했던 달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한 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은 나무 위에 얹힌 눈 더미이었으며 바닥은 뽀드득거리는 눈길로 이어져 아이젠을 착용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어설픈 눈길에서는 그대로 견디는 것이 오히려 편하므로 그만두는 편을 택했다.

산행 중 나는 선두리더를 바짝 뒤를 따르려고 애쓴다. 그것은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의 에너지를 소모하며 걷더라도 뒤에 처져서 따라다니는 것보다 앞장서는 것이 훨씬 덜 힘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칠흑 같던 대기가 조금씩은 뿌옇게 벗어지기 시작한다. 리더는 이때부터 부쩍 일출이라는 낱말을 자주 입에 올리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토끼처럼 ‘늦겠는데, 늦겠는데.’ 하는 몸짓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일출의 장관을 보여줘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해 보였다. 숲에서 벗어나며 갑자기 전면으로 시야가 트이고 고갯마루가 훤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억새밭이었다. 리더는 고개만 올라서면 일출을 맞을 수 있으며, 서둘렀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하다고 안도케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의 걸음을 결코 늦추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갑사에서 시작하여 1시간 반 만에 올라온 고개는 미왕재라 하였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건너편에서 한파를 실은 매운바람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안면을 세차게 강타한다. 낯가죽이 금방 뻣뻣하게 얼어오는 듯하고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풍을 피하여 움푹한 바위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동북쪽 산릉으로 해가 솟아오르기만 고대하였다.

고개에서 5분쯤 지난 7시 15분. 마침내 언젠가 동해 멀리 떠오르는 해를 보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 맑은 불덩이의 둥그런 일각이 삐죽이 밀려 나오듯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일행 중에는 비벼대던 언 손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양, 때늦은 ‘야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매섭게 쓸고 가는 바람과 함께 곧 사라졌다.

월출산에서 보는 일출. ‘월출’이 고요한 밤을 그윽이 밝혀주는 정적인 모습이라면 ‘일출’은 하루를 장엄하게 시작하는 경건한 의식과 같은 것이다. 산 위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해맞이 기회를 오늘 갖게 된 것이다. 막연해 보이던 산봉우리들 음영의 윤곽이 해 뜨자 산뜻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경험이 있어서 잘 아는 듯한 일부 노장들은 미리 옆길로 빠져들고, 리더가 이끄는 그 밖의 젊은 대원들은 험준해 보이는 능선을 직접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선두그룹에 있다 보니 노장 축에 끼이게 되었으며 이 길은 산 등을 형성하고 있는 기묘한 바위들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덮치는 순간을 정지시켜 놓은 듯한 바위, 배부른 사람 형상의 입석(立石), 그 밖에도 이렇게 보면 이런 모양이 나고 또 저렇게 생각하면 다른 모양으로 보이는 천연 조각품들의 진열장. 산행으로 조물주의 걸작품들을 둘러보는 셈이었다. 그 모양은 석탑, 연꽃 송이, 불상, 뱀의 머리, 매부리, 심지어는 포옹하는 남녀 상 같은 형상들이 널려있다. 하나 일일이 찾아보며 음미할 여유가 없는 것이 아쉽다.

구정봉 부근에서 다른 길을 갔던 리더 일행과 합류하고 정상 천황봉에 오르니 전망이 시원스럽다. 북쪽으로 발치 아래에 영암 소읍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청명한 날은 남해 쪽빛 바다와 목포 유달산, 광주 무등산까지 시계(視界)가 미친다는데 오늘은 그저 뿌연 안갯속에 흐릿할 뿐이다. 다만 우리가 지나온 월출산의 구정봉 향로봉 발봉 등 봉우리와 능선의 빼어난 모습들만 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통천문을 지나 구름다리, 바람골을 경유 천황사 부근까지 내달으니 여기저기 우람하고 싱싱한 동백나무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으나 꽃이 피기에는 시기상조인 듯 봉오리들만 한껏 부풀어 있다.

오늘은 일출을 맞으며 하루를 산뜻하게 열었으니 월출산 암봉 위에 걸린 둥근달의 모습과 붉게 핀 동백꽃의 시정(詩情)을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은 기꺼이 다음에 다시 찾을 구실로 삼아야겠다. (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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