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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13)

by 김헌삼

호명산 설제(雪祭)


예보된 대로 엊저녁부터 시작한 비는 밤새 뿌리고 아침이 되어도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신문이 왔나 본다는 핑계로 두 번이나 나가보니 그 기세는 여전하다. 오랜 가뭄을 해소하며 우수(雨水)에 맞춰 촉촉하게 내리니 봄을 재촉하는 단비이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산행계획을 잡은 휴일에 맞춘 것이 유감스럽다.

오늘은 시산제(始山祭)를 겸한 산행이라 하여 먹을 것들을 일체 제공한다니 간단한 채비로 갈 생각이지만 우중 산행에 대비하여 여벌 옷을 비롯하여 우의 우산 등을 챙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직감대로 동행키로 한 일행 중 하나가 비가 이렇게 오는 데도 가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로 똑 부러지게 그렇다고 했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므로 아마 그런 줄 알면서도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한번 확인하는 척한 것일 수 있다. 이어 날아온 또 다른 전화는 아예 꼭 참석해야 할 행사가 생겨 못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발 직전의 이 아침에서야 그런 통보를 해오는 것이 수상쩍다. 짐작되는 바 있어도 모른 체해두는 것이 서로 편하게 사는 방법이리라. 산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기로 약속해 놨어도 당일 나와야 정말 가는 것이라고 평판 나 있는 L한테서는 전화조차 없어서 혹시나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종무소식이었다. 비가 전날부터 그치지 않을 태세로 계속하여 내리고 있었다는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나중에 뭐라고 했다가는 오히려 기대한 쪽이 어리석다 할 것이다.

이렇게 줄기찬 빗속에서도 버스 두 대가 가득 찰 정도로 회원들의 참여율이 높은 것은 산속에서 한동안 숯 굽다가 온 사람 같은 인상의 등반대장 인덕인지 모르겠다. 그의 얼굴 생김이나 행동거지에서 풍기는 신선하리만큼 순박함이 도시인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인가 싶다.

대성리를 지나 팔각정휴게소 못 미치는 지점에서 우측 청평호를 끼고도는 비포장 길로 한참 들어가다가 호숫가가 움푹 들어간 끄트머리 호명리란 마을 새마을회관 앞에서 하차하였다. 마침 회관 건물 전면으로 널찍한 차양이 드리워있어서 우리는 그 밑에서 비를 피하며 산행 채비를 한다. 우산을 펴 들거나 우의 판초를 입고 뒤집어쓰고 등산로로 이어지는 빈 농가 옆에 마련된 제단 방향으로 몰려갔다. 산역(山役) 장소처럼 넓은 비 막이 차일을 높이 쳐놓았는데 그 아래가 제단이었으며 진행요원들이 먼저 와서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시산제는 설제(雪祭)라고도 하며 지난해의 무사고 산행에 감사하고 새해에도 안전을 기원할 뿐 아니라 산신령께 소원성취와 복을 빈다는 의미로는 다분히 고사(告祀)의 성격이다. 제례(祭禮)를 주관하는 산악회 측이나 이에 참여하는 회원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 서로서로 고맙게 여기는 마음으로 기념품과 성금을 주고받는 축제 행사인 것이다. 우리가 예로부터 토속신앙으로 호랑이를 산신령과 연관 지어 왔던 점을 상기하면 ‘호랑이울음산’ 또는 ‘호랑이가 울던 산’이라는 뜻을 지닌 호명산(虎鳴山)을 시산제 장소로 정한 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라 하겠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속을 걷는 것은 결코 흥겹거나 편안한 산행일 수 없다. 그러나 담담한 마음으로 임하리라 다짐한다. 몇 기의 무덤이 있는 곳을 지나면서부터 빗방울이 진눈깨비로 바뀌었으며 급경사진 능선을 타오르기 시작할 때는 몹시 미끄러워 선두 속도가 뚝 떨어지고 급기야 정체 현상을 빚는다. 그사이 뒤쪽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일행 중 하나가 넘어지며 비탈길 아래 10여 미터 정도를 속수무책으로 구르고 있었다. 다행히 본인이 먼저 괜찮다고 소리쳐 우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제는 아이젠을 착용하는 게 좋겠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진눈깨비는 어느새 작은 눈발로, 새털 같던 눈들은 활짝 핀 목화송이 크기로 변하여 소리 없이 날리고 있다. 온화한 가운데 조용히. 그러나 풍성하게 내리는 푼수가 축제를 기리는 춘설(春雪)이 아니겠는가. 올라가며 오른편으로는 칙칙하게 서 있는 나무숲 사이로 함박꽃잎 같은, 아니 어린아이 주먹처럼 커 보이는 눈송이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으로 하강하고 있다. 그것은 온 산에 하얀 꽃이 만발한 것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 용솟음치는 뿌듯함을 참지 못한 탄성과 환희의 소리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폭발하여 고즈넉해야 할 산간이 떠들썩하다.

이조 순조·철종 연간의 화가 전기(田琦)의 그림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를 접했을 때는 화폭 가득히 매화꽃이 피어있는 풍경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모습이 연상됐었는데, 지금 산간에 주먹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백화(白花)가 천지간에 충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왼편으로는 이와 대조적으로 색다른 경치가 펼쳐있다. 내린 눈들이 나무줄기를 하얗게 뒤덮기도 하고 가지들 위에 소복하게 얹혀 온통 순백의 은세계를 이룬다. 먼 빛의 수목들은 물론 가까이 있는 것들조차 나무로써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하얀 모양이다. 어렴풋하고 아득한 느낌 속에 내가 갑자기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요정의 나라, 현세가 아닌 이상의 세계에 와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집터를 거쳐 632미터 의 호명산 정상, 정상에서 다시 서북 능선을 따라 610 고지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날리는 눈발 속에서 시야가 흐려 남쪽 멀리 청평호반의 그림 같은 전망이 트이지 않았다고 해서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바로 주변의 설경만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봐도 지루한 줄 모르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잡은 행운으로 다시 보려 해도 마음먹은 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이 선계(仙界)를 뒤로하고 하산해야 하는 데는 삭여야 하는 큰 아쉬움이었다.

차차 낮은 곳으로 내려오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눈의 자취는 보이지 않게 되고 웬 왁자한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서,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들어보니 범울이계곡이 발원하는 물소리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흩뿌리는 빗발의 굵기와 강우량은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와 변함없는 것이어서 그사이 산속에서 겪었던 것들은 꿈속에서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마치 아련한 몽환에서 깨어나듯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기나긴 범울이계곡 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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