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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은 다 어디에(2)

by 김헌삼


피란지 외가의 추억


백석의 시 「여우난 곬족」을 읽으며 묵은 사진첩을 보듯 64년 전 외가에서의 피란 시절을 떠올린다.

내 나이 열 살 때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고 얼마 안 되어 6.25 동란이 발발하였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사태를 봐가며 움직이기로 하고 나는 여섯 살 아래의 아우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산골 외갓집으로 피란하여 머무르게 되었다. 외가에서의 더부살이 생활은 1년이 좀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사계절을 고루 겪다 보니 몇 년을 지낸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순전히 몸을 써 논밭 갈고 길쌈하는 근대화 이전의 고단한 농촌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일찍이 알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대체로 산이 많지 않은 지역이지만 앞으로 펼쳐진 들판보다는 저울산이라는 뒷산의 인상이 추억 속에 더 생생하며 그 산자락에 집들이 모여 있는 국수골이라는 곳이 내 외갓집이 자리한 동네였다. 외가를 포함하여 담양 전(田) 씨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다.

동네의 맨 위쪽에 전 씨 일가의 종가인 대갓집이 터 잡고 있었다. 고래등 같은 본채가 길게 뻗쳤고, 1미터 정도의 한 단 아래로 안마당이 비교적 넓게 차지했으며 본채와 마당 건너 사랑채가 나란히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는 동편에 커다란 대문으로 연결되었고 문 옆에는 절구통과 디딜방아 등 도정 설비가 배치됐었다. 본채는 부엌 안방 윗방 대청마루와 대문과 연결되는 쪽 끝부분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조상들의 공간이 따로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채도 마루가 딸려 거기는 이 집의 가장 웃어른이 꼿꼿한 자세로 한가하게 홀로 앉아 들녘을 바라보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 밖에도 젊은이들을 위한 별채가 몇 있었던 것 같다.

외가는 이 집과 아주 가까운 친척은 못되어 명절이나 큰 행사에 가족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외숙모나 어머니가 일을 거들러 드나들었으며 그때는 거의 빠짐없이 나와 동생을 대동했다. 내 기억 속의 풍경들은 그때 인상 지워져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것들이다.

사랑 쪽의 한적함과는 달리 안채에서는 언제나 많은 식구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집에 기거하는 식구 수가 얼마나 되며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 집의 주인이 되는 4,50대의 중년 부부와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파란 큰아들과 새댁, 그리고 갓난쟁이 아이들, 아마도 도내 인근 소도시로 가서 유학 생활 중에 전쟁 바람에 집에 와있는 중고생 또래의 작은 아들들 등 십 수 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며 북적이고 있었다.

그동안은 용수(用水) 조달을 어떻게 했었는지, 동네 한복판 공동 샘물에서 길어다 썼는지 어땠는지 그 무렵 너덧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우물을 파는 일이 한참이었다. 흙은 파내고 걸리는 바윗돌은 쪼아 우물을 조성하는데 한세월 걸리는 공사인 듯했다. 완성되었을 때는 대갓집 우물답게 까마득하게 깊어 고개를 처박고 무어라 소리 지르면 더 큰 울림이 되돌아오고는 했다. 길어 올려 두레박 채 들고 물을 마시면 차디차다 못해 이가 시렸다.

외갓집 동네에서 지내는 동안 추석과 설 두 차례의 명절이 끼어 있었다. 명절 때가 기다려졌던 것은 평소에 입에 대보지 못하던 음식들을 먹는 즐거움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새 옷을 입게 되는 설렘이 더 컸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어른들이 입던 옷들에서 성한 부분을 알뜰하게 발라 깨끗이 빨아 곱게 물들이고 마름질하여 새 냄새가 상큼 풍기는 옷을 지어주셨다. 만들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들뜨고 어서 명절날 아침이 되었으면 했다. 아무래도 새 감이 아니라 일찍 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새 옷을 입는 기쁨이 컸으며 이것이 아니었으면 명절 기분은 한풀 꺾였을 것이다.

먼저 겪은 추석의 기억은 흐릿하다. 다만 새로 사귄 동네 아이들을 좇아 대갓집 인근 뒷산으로 공비들처럼 잠입, 알밤을 서리하여 대님 찬 바짓가랑이 속에 묵직하게 닥치는 대로 쑤셔 넣고 시간을 다퉈 빠져나왔던 것은 추석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설 때의 경험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하다. 섣달그믐에는 집 안팎으로 대청소하여 정갈하게 하였으며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참고 견디려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있다. 설음식들은 쌀 외에도 송화와 검은깨를 원재료로 한 각종 다식과 유과 조청과 엿 식혜 등 평소에는 꿈도 못 꾸던 달콤한 음식들을 이때는 자주 맛볼 수 있었다. 몇 점도 안 되는 육 고기와 고깃국물도 설날 아침에야 비로소 맛보고 황홀함을 느낄 정도로 형편이 어렵고 암울한 시기였다.

어머니를 포함하여 부인네들이 한 방 가득 둘러앉아 댓잎이 붙은 잔가지 묶음으로 꼭두각시를 만들어 신수점을 보는 놀이를 하던 풍습도 정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운수에 대한 관심사는 아버지와의 재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보름에 쥐불을 놓고 마을 간에 돌싸움[石戰]을 하며 누가 던진 돌에 누가 얻어맞았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젊은 남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꽃 피는 봄이 오며 나는 불쑥 찾아오신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머니와 동생을 뒤로한 채 그곳을 떠나야 했다. 팽개치다시피 한 학업을 이어야 하는 것이 나만 데려가는 이유였다. 얼마 후 아우도 오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새 삶을 찾아 우리 곁을 영영 떠났고 그 뒤로는 외갓집도 외가 식구들도 못 보게 되었다.

수년 전 60여 년 만에 아우와 함께 기억을 더듬어 외갓집 동네를 찾아 외숙을 만났다. 어머니는 그 동네에 살지도 않았었지만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20대의 청년이었던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얼굴을 빼닮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외숙모라는 분은 희미하게나마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인가 생각되었다. 외숙은 하도 오랜만에 찾아뵌 원망으로인지, 피차 늙어있는 처지 때문인지, 병고의 그늘에 잠겨서 인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서먹서먹하여 기억은 되나 확신이 안 가던 저울산과 국수골의 이름을 확인받은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곧 집을 나와, 그때 살던 곳을 찾았으나 추억 속에 그려져 있는 풍경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꽤 높게 보았던 동네 뒷산은 얕은 동산으로 내려앉은 듯했고 너른 논배미는 텃밭으로 변해 특수작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곳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는 한 아낙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으려니 그는 이곳에 정착한 지 십수 년 밖에 안된다니 나에게는 타지인과 다름없었다. 그 많던 전 씨들은 모두 떠나고 외숙만 남아있다고 했다. 당당하던 대갓집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닌 내 손자 또래를 나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훌쩍 커버리고 세월을 쌓으며 변한 것은 생각 안 하고 내가 서 있는 주변 환경이 왜소해지고 사라진 것만 탓하고 있었다. 옛것들은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현상에서 사라지고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사라진 옛일들은 고단함의 연속이었어도 먼 훗날 뒤돌아보면 그때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생각이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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