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이라니 어디 마음의 고향, 몸의 고향이 따로 있겠는가. 고향이라면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 시골 또는 어렸을 때 살며 자라던 곳 등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데, 이 중에서 내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그 시절을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는 곳이 되겠다.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6.25가 발발할 때까지 살던 인천과 우선 피난 가서 이듬해 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떠날 때까지 머무르던 외가,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낸, 그야말로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보령의 청라를 고향으로 생각하고 그 시절을 문득문득 떠올려 보고는 한다.
인천
내 어린 시절의 초기, 의식에 눈뜨기 시작할 무렵 살던 인천시 송림동 123번지의 기와집. 지금 생각하면 집 장사들이 지어놓은 듯 비슷한 구조로 대여섯 채 단위로 2열씩 쭉 늘어서 있었던 것 중 하나였다. 이쪽에서 보면 큰길과 면한 첫 집이고 반대쪽에서 보면 물론 끝 집이었다.
부엌과 다락이 낀 안방, 안방과 건넛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다. 마루 쪽 안방 문 위에는 몇 개의 액자가 걸려있었다. 주로 아버지의 결혼 전후 청년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찍은 사진들. 이발소에서 흔히 보는 백양나무 숲 속에 거울같이 맑은 호수가 있고 호수에는 백조 한 쌍이 한가롭게 노니는 그림 같기도 하고 사진처럼 보이는 풍경화.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을 도자기 주전자 사이에 풍성하게 모아놓고 그린 정물화. 반백의 머리에 빨간 머플러를 한 베토벤의 근엄한 초상화가 이들이었다.
건넛방 옆에는 별도로 출입하게 된 여닫이문이 달린 끝방이 있었다. 이 방에서 신혼의 작은 아버지 어머니가 분가할 때까지 기거했고 시집간 둘째 고모도 방 구해 나갈 때까지 잠시 머물렀다. 대문은 변소와 부엌을 가르며 그 사이에 있었다. 끝방 앞에 장독대가 있고 그 옆으로 송판으로 꽤 크게 지어놓은 창고였는데 그 안에는 주로 땔나무를 쌓아 두었다. 제재소에서 나온 쓸모없는 각목이나 널빤지들이었다. 가끔은 도둑고양이(지금은 길고양이라 한다)가 들어와 어둑한 곳에 서너 마리씩 새끼를 낳아 어느 정도 크면 어디론가 가버리고는 했다.
대문 밖으로 나오면 같은 구조와 비슷한 모양의 윗동네 집들과 가르는 3,4미터 폭의 뻥 뚫린 길이었는데 여름날 저녁밥 지을 무렵이면 집집이 연기 나는 갈탄 풍로를 내놓고 매운 눈물을 훔치며 부채질로 불을 피우는 주부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계층이어서 수도국(水道局) 산 너머 공장에 일하러 다니는 사람, 학교 선생님, 개 건너로 고기 잡으러 다니는 어부 등이 어울려 살았다. 아버지는 방적회사의 경리나 관리직이었던 것같았다. 바로 옆집은 박수무당이 살았는데 딸 하나는 화냥기가 얼마나 심했는지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서 그년 그것은 다 닳았을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궁금했지만 바로 옆에 살면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일이 없다.
대문을 마주 보는 길 건너에 사는 앞 못 보는 할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손녀 손에 잡히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가고는 했다. 한 번은 발을 헛디디며 꽤 더듬거렸던 모양으로 그 손녀가 참다못해 확 내뱉는 말이 “이 노인네가 눈이 멀었나!”였다. 웃음이 나와도 무안해할까 억지로 참았던 기억이다.
도시이기는 해도 변두리라서 논밭이 가까이에 즐비하게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노는 일은 주로 자연과 친한 것이었다. 논에서 튀는 개구리를 잡아 패대기쳐 기절시킨 다음 배 위에 풀잎을 십자로 올려놓고 침을 탁탁 뱉으며 다시 살린다고 했다. 옥수수 대에서 잡은 풍뎅이 발을 모두 끊어 뒤집어 놓고 퍼덕거릴 때마다 “앞마당 쓸어라. 뒷마당 쓸어라” 주문을 읊기도 했다. 땅강아지의 뒷다리에 실을 어렵게 묶어 잡아끄는 등 생명 외경을 부르짖던 슈바이처박사가 알면 진노할 갖은 몹쓸 짓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안가 도시라 각종 어패류 껍질이 흔했는데 대합이나 모시조개 양쪽이 붙은 볼록한 부분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 구멍을 내어 불었다. ‘음음’하는 매미 소리 외에 다른 음은 나오지 않아도 하모니카처럼 입에 물고 다녔다. 좀 고급의 놀이가 구슬치기였는데 나보다 몇 살 많은 태영이는 구슬 놀이는 무엇이든지 기술이 월등하여 동네 아이들의 것을 모두 따다시피 하여 구멍가게에서 10원에 열 개씩 산다면 스무 개씩 주고 원하는 아이들에게 되팔고는 했다. 살림에 보탤 정도는 아니겠지만 용돈은 꽤 모았을 것이다.
공장지대와 번화한 시가지가 있는 해안가 쪽을 하인천이라 해서 우리가 사는 상인천과 구분했는데 이를 수도국(水道局) 산이 가르고 있었다. 산이라기보다 배수지가 있는 언덕으로 벚나무 아카시아 등 덩치 큰 나무들이 많아 우리는 통상 수도국산이라 불렀다. 봄이 되어 벚꽃이 만개하면 동네에서도 보고 즐길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으련만 꺾어다 병에 꽂는다고 무단침입했다가 관리인에게 쫓겨 혼쭐나게 도망치고는 했다. 언젠가는 홀로 철조망에 옷이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절절맨 적도 있었다. 그러고도 아카시아 꽃이 피면 그것을 따먹으러 또 철조망을 넘었다.
무엇보다도 이 해안도시에 살면서 가장 인상적이고 추억거리가 되는 것은 단연 망둥이 낚시였다.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서 망둥어잡이는 여름철 피서 행사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기다란 대낚시 두서너 개와 고기 담는 통은 집집이 필수품처럼 갖추고 있었다.
한여름 햇볕 좋은 날 물때에 맞춰 아버지나 삼촌을 따라 나무와 대를 섞어 물이 잘 빠지도록 만든 고기 통을 낚시와 함께 둘러메고 갯가로 나간다. 팬티만 남기고 벗은 옷들을 돌돌 말아 혁대로 간단하게 묶어 어깨에 짊어지거나 그것이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우면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방파제 돌 틈에 숨겨두기도 했다. 우선 갯바닥을 깊이 파 미끼로 쓸 갯지렁이를 잡아 굵은소금이 깔린 미끼통에 담는다. 미끼통은 반으로 자른 깡통으로 고기 통에 매달려있다. 바닷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할 때에 맞춰 개펄을 한참 걸어 나간다. 물살이 바쁜 사람 걸음걸이처럼 빠르게 들어올 때는 시원한 바람도 함께 실려 오고 가끔은 소금 실을 돛배도 염전이 있는 주안 쪽을 향하여 바람과 물살을 타고 지나간다. 걸친 속옷이 젖거나 말거나 물에 잠겨 몸을 축이고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것, 바로 이것이 고기를 낚으며 하는 피서였다.
누가 낚싯대를 잡아채 힘껏 돌리며 “원산 말뚝이요!” 한껏 과장되게 외친다. 첫째로 한 마리 낚았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서 걷어 올리는 소리가 부산하다. 그러나 낚시는 오래 할 수가 없다. 한두 시간만 해도 어깨와 등이 발갛게 익고, 물이 들어오는 대로 뒤로 밀리다가 적당한 선에서 철수해야 한다. 갯골에 물이 차 퇴로가 차단되면 고립되어 빠져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잡은 고기는 바로 회로 먹기도 하지만 보글보글 찌개 끓여 먹는 것이 일품이었고, 말려두었다가 두고두고 구어도 꼬들꼬들한 맛이 좋았다.
얼얼하게 익었던 등에 물집이 생기고 한차례 쓰라림을 겪고 나면 검게 변하며 한 꺼풀 벗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찬바람이 돌며 여름은 가고 있었다.
외가(外家)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피란으로 염치없이 찾아간 외가는 그야말로 외진 곳이었다. 어리기 때문에 멀리 나다니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인근에 차 다니는 길도 없고 눈길이 닿는 곳에 기와집 한 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산골도 아닌데 왜 그렇게 외졌었는지 모르겠다. 전 씨(田氏) 집성촌으로 동네 위쪽에 증손까지 4대가 함께 사는 전씨네 대가(大家)가 있었는데 집은 상당히 넓게 차지하고 칸수가 많았지만 이조차 초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멀리서 포성이 간헐적으로 들리고 한때 세상이 뒤집히는 일도 있었지만, 인민군이라는 누리끼리한 군복 입은 무리는 멀리서 서너 명이 서성이는 것을 한번 봤을 뿐이다. 가끔 청년들이 국군으로, 적 치하가 되었을 때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찍혀나가고 이런저런 뒤숭숭한 소문들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동네에서는 그 당시 어디서고 흔히 있었던, 끌려가 개죽음당하는 일 없이 전시를 잘 넘기는 것같이 보였다. 불안해하면서도 중년 남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 농토지만 평상시처럼 땀 흘려 농사를 짓고 여자들은 삼베 모시 무명 등 길쌈하기에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먹고 입는 것은 모두 자급자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새우젓이나 소금은 이곳에서 나는 콩이나 감 밤 등 과일을 이고 십 리인지 이십 리인지 떨어진 갯마을에 가서 바꿔왔다. 우리나라가 산업화하기 이전의 정통적인 농경사회의 맛을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본 것이다.
옅은 안개 낀 이른 아침 머리채를 길게 땋아 내린 처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부산하게 오락가락하거나, 남정네들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퇴비를 한 지게씩 져 날라 밭에 부리곤 하는 풍경은 흔히 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방안에 들어앉아 콜록거리며 새끼를 꼬거나 돗자리를 매고 짚신 삼기가 일상의 일이었다. 애 봐주는 것은 할머니나 언니 몫이었다.
여기서 새로 입게 된 옷들은 완전히 바지저고리로 바뀌어 갔는데 주로 명절 때 외할머니가 손수 지어주는 새 옷에서 비롯되었다. 새 옷이라 해야 어른이 입던 옷에서 성한 부분을 발라내어 곱게 물들이고 손질하여 만든 것으로 처음에는 번드르르해도 근본이 헌 것이라 쉬 해졌다. 떨어진 곳은 물론 기워 입었다. 나는 학교 다니던 몸이지만 책은 물론 공책이나 몽당연필 하나 가져온 것도 없었고 언제 공부했더냐 싶게 무위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차차 아이들을 사귀어 논밭으로 산자락으로 따라다니며 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 버거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끔은 아이들과 풋콩이나 청 보리 서리에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때는 죄스러운 마음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추석이 지나고 몇 명의 아이들이 대갓집 뒷산에 잠입하여 몰래 밤을 털 때는 가시 때문에 밤송이를 발라 알밤을 괴춤에 챙겨 넣는 속도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훨씬 느렸다. 주운 밤을 허리 속으로 집어넣으면 맨살을 타고 들어가 대님 맨 종아리 부분에 쌓였다. 무릎만큼 차자 아이들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북한산을 타던 김신조 일당처럼 감기는 수풀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잘도 뛰어 내려갔다. 너무 뒤진 나는 호랑이 같은 주인 영감의 일갈(一喝)이 곧 들릴 듯하고 혼자 잡힐 것 같아 얼마나 애간장을 조이며 불안해했는지 모른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밤이 되면 어른들이 없는, 있어도 마음이 너그럽고 싫어하지 않을 만한 집을 골라 모여든다. 그리고는 어두운 방에 나란히 누워 옛날이야기들을 돌려가며 들려주고 듣고는 했다. 처녀로 변신하여 유혹하는 늙은 여우 이야기나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 이야기 아니면 선행과 효심에 감응하여 황금이나 잉어를 내렸다는 이야기 등 여러 번 해서 듣고 또 들은 것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과 동떨어지고 꿈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흥미 있었고, 또한 이것이 우리에게는 암울한 시기에 시장기를 견디며 긴긴 겨울밤을 나는 유일한 낙이었다.
이듬해 봄 동네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학교에 넣어야 한다고 조부가 나를 데려가려고 어려운 걸음을 하신 것이다. 불편한 시골 생활에도 점차 익숙해지며 그 맛을 알게 되고 사람들과도 정이 들어, 모든 것을 떨치고 떠나게 된 것이 얼마나 아쉽고 서운했는지 모른다. 비록 일 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수년을 산 것 같은 느낌인 것은 많은 추억거리가 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령
‘만세보령(萬歲保寧)’의 땅 보령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으며 또한 고이 잠들어 계신 고향이지만 처음에 나로서는 생소하여 낯선 타향과 같았고, 그나마 6.25 때문에 어린 시절에 찾을 수 있게 된 고장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디던 날 학교 앞 큰 도로변에 활짝 피어있던 벚꽃을 잊지 못한다. 줄지어 선 고목마다 하얀 뭉게구름처럼 만개한 꽃들은 따스하게 비치는 햇빛을 받아 그 화사함이 한층 돋보였었다. 벌들이 꽃에서 꽃으로 잉잉 소리 내며 부산하게 이동하고, 떨어진 꽃잎들이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이곳도 물론 시골이었지만 외가가 있는 마을보다는 훨씬 깨어있는 동네였다. 우선 대처로 연결되는 도로가 가로질러, 가끔이라도 자동차가 지나다녔고 가까이에 비록 초등학교이지만 학교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소방서, 면사무소 등 기와 건물들이 즐비하게 붙어있었다. 오일장이 서서 장마당을 헤집고 다니면 새롭게 나오는 신기한 물건을 가져보지는 못해도 구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 다니니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살맛이 났다. 동란 전 겨우 한글을 깨치는 저학년의 수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배우는 것은 ‘왜’와 ‘어떻게’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 많았고 특히 국어책에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재미있었다. 그래서 큰소리로 읽고 또 읽으며 교과서의 내용은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이는 지식은 교과서 수준을 넘지 못했다. 학기 초에 무료로 지급되는 국어 산수 자연 사회 그리고 농사짓기 등의 국정교과서 외에 다른 책은 내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서울에서 피난 온 광이라는 아이가 가끔 학생 잡지 ‘소년세계’나 ‘학원’을 가지고 오는 날이 있었는데 반장에게만 특별히 잠깐 보여주는 외에는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아 나는 감히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두 명의 아이가 백문백답(百問百答)으로 되어 있는 「아동상식」이라는 책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책에는 내가 모르는 지식이 많아 몹시 갖고 싶었다. 그러나 없다고 안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걸 사달라고 하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주저하고 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망설임에 비하여 책값을 쉽게 선 듯 받았을 때의 뛸 듯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장 같은 마을에 친하게 지내는 여철이와 함께 대천 읍내를 향해 달린다. 책을 살 수 있는 곳은 9킬로 떨어진 읍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는 급한 마음에 주로 뛰고 정 힘들면 가끔은 걷기도 했다. 그런데 1킬로나 되었을까 하는 지점에 이르러 갑자기 천둥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 옷이 흠뻑 젖었고, 몸이 세찬 비바람에 밀려 전진이 안 될 정도였다. 하늘을 가르며 번개도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좀처럼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도로 위에, 아니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여철이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 돌아가자고 했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그래도 읍내를 향해 달렸을 것 같다. 친구의 말을 거역할 상황이 아니어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돌아와 돈을 반납했다. 그리고 다시 달라 소리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이 대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지니고 있다가 나중에 사러 가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 이미 책값으로 확보된 것인데 왜 다시 달라는 말이 안 나왔을까. 돈은 긴요한 것이지만 지니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죄송한 것이었던가. 책을 사기 위하여 폭우를 가르며 미루나무 가로수들이 몸부림치는 이 십리 길을 단숨에 달리려 했던 이 장면을, 글을 쓴다면 꼭 첫머리로 넣고 싶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아이들과 놀며 가끔 김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장군 놀이터’가 있다는 말도 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익낭이라 했고 이에 붙어서 좀 위쪽으로 올라가면 윗익낭이 있었다. 윗익낭 약간 언덕진 곳 밭두둑 사이에 웬만한 집채 크기의 둥그스름한 바위 하나가 홀로 있다. 이 바위가 김장군이 갖고 놀던 공깃돌이라고 했다. 보령 땅 여기저기에 비슷한 크기의 바위 다섯 개가 흩어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중 하나로 성주산 꼭대기에서 장군이 공기놀이를 하다 집어던져 여기에 떨어진 것이라 아이들은 가르쳐 주었다. 한쪽에 움푹 들어간 부분은 던질 때의 손자국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 김장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지어냈을 것이다. 우리는 공깃돌 바위에 낑낑대고 올라가 놀기도 했다.
당시는 몰랐었는데 김장군이 바로 우리의 직계 조상으로서 고려 말에 도만호(都萬戶)로서 보령 앞바다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김장군을 둘러싸고는 신마(神馬)와 보검(寶劍)이 저절로 굴러들어 와 도왔다는 등 신화적인 전설도 많이 따라다닌다. 고향에 내려가면 여기저기에서 김성우(金成雨) 장군의 전첩지 등 사적과 추모비, 유허비 등에 쓰여 있는 행적을 읽을 수 있다. 인근의 복병(伏兵), 불무골, 갬발 <蟻坪> 등 땅이름은 그때 전투와 관련하여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근래의 일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고향은 20년 30년 또는 반백 년이 흐르며 많이도 변했다. 단오면 굵은 동아줄을 틀어 그네를 매던 동네 어귀의 멋들어진 노송, 비 오는 날이나 밤중에 그 옆 지나기를 몹시 꺼리던 외진 곳 상엿집이 사라졌다. 집 모습은 초가 돌담에서 어엿한 개량식 양옥으로 바뀌고, 큰 길이 뚫리느라 마을 일부가 잘려나가면서 두메산골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함께 뛰놀며 싸우며 정을 쌓던 아이들도 다 늙어버리고 그마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불쑥불쑥 생각나 감회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