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산 용추와 촛대바위
대야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게 느껴졌다. 중부고속도로 증평인터체인지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자 왠지 이제 얼추 왔으리라는 기분이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런 안내가 없다. 머릿속 짐작과는 달리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태백산맥의 태백산을 기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갈라져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를 이루며 힘차게 뻗어 내린 소백산맥의 줄기, 그 저편으로 넘어갈 때는 언제나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더욱이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거쳐 불란치재를 휘어 넘는 비포장 길은 거리도 있으려니와 좁고 구불거리며 험하여, 노련한 관광버스 기사도 조심운전을 하다 보니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듯하다. 소백산맥의 만만찮은 산세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산행의 기점이 되는 문경군 가은읍 벌바위마을 삼거리에 다다른 시각은 서울을 떠난 지 4시간 만인 11시경이었다. 먼저 도착한 버스 두 대가 사람들을 모두 비우고 한가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으며 조금 들어간 지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주차공간에도 몇 대의 승용차와 봉고가 직수굿이 서 있었다. 아마 오늘 대야산에는 이 정도 차량의 탑승 인원만 들어섰을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찾아오기 불편하고 부근에는 웬만한 중소도시조차 형성돼있지 않아 개별적으로 찾아올만한 인적자원도 별로 없을 것으로 짐작되니 말이다.
가옥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대야산(大耶山 931m)의 정상은 범상한 자태로 물러앉아 있듯 멀리 위치하고 산의 비경들은 글자 그대로 꼭꼭 숨어있어 깊숙이 들어가 보기 전에는 진면목을 가늠하기 어렵다. 정상을 목표로 하여 좁은 콘크리트 길을 따라가면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우렁차고, 청아한 음향으로서 몸속 구석구석으로 녹아들며 시원함을 더한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흐르는 물에 씻기고 씻긴 듯이 하얗게 바랜 반석들, 그 위로 예나 다름없이 물이 흐르고 사이사이 와폭(臥瀑) 탕(湯) 소(沼) 담(潭) 등이 줄줄이 다른 모습으로 선보인다. 그 수려한 경관에 일행들의 탄성과 상찬(賞讚)의 소리가 어지럽게 인다. 산행코스가 이렇게 무난할 줄 알았더라면 부인을 동반할 걸 하고 혼자 보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동료도 있다.
대야산 계곡의, 아니 대야산의 백미라 하면 무엇보다도 용추(龍湫)를 들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산을 기억해 두고 찾아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도 백 마디 찬탄의 안내 글보다는 용추 한 장의 사진에 반해서였다. 용추란 용소(龍沼)와 같은 의미로 ‘폭포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물받이로 된 깊은 웅덩이’를 일컫는 말이다. 대야산 용추골에는 윗용추와 아랫용추가 잇달아 파여 있다.
윗용추는 거대한 화강암반의 굴곡진 곳을 따라 흘러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 절묘하게 움푹 팬 하트 모양의 탕이며, 아랫용추는 윗용추에 가득히 담긴 푸르디푸른 물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심연 속에서 솟아오르듯 넘쳐흐르며 만들어진 또 하나의 탕이다. 윗용추가 용머리의 형상이라면 아랫용추는 그 꼬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윗용추에서는 암용이, 아랫용추에서는 숫용이 노닐다가 승천하였다 하여 각각 암용추와 수용추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생긴 모양의 기묘함, 완곡하게 파여 들어간 선의 부드러움, 몸통을 이루는 암반은 여성 같은 뽀얀 때깔과 매끄러움을 지니고 있어 조물주의 걸작품이라 할 만하며 이 자연의 경이를 한동안 넋 놓고 감상하게 된다. 안내도에는 용추와 좀 떨어져서 무당소 말십소 가마소 등의 표시가 있는데 용추 주변의 움푹움푹 들어간 곳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될 뿐 어느 게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다.
더 위쪽으로 향하다 보면 우리가 계속해서 올라갈 다래골과 정상을 거쳐 돌아 내려오기로 된 피아골이 합쳐지는 자리에 월영대라는 넓고 편편한 반석이 나타난다. 달맞이[月迎] 장소라는 뜻으로 봐도, 부근에 어린 달그림자[月影]가 인상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달 밝은 밤이라면 하얗게 씻긴 바위와 그 위로 쉼 없이 흘러가는 맑은 물, 청류(淸流)에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창백하게 비치고 한 가닥 바람결에도 잔잔한 미소를 흘리듯 숲이 흐느적거릴 때, 달그림자 또한 서늘하게 일렁이는 일품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기는 어렵지 않다.
특히 주변에는 큼직한 술상바위가 다섯 개나 널려 있어 여기서 달을 쳐다보며 한잔하고 저기로 옮겨가서 정처 없이 흘러가는 물을 들여다보며 또 한잔 걸치는 이태백식의 풍류가 곧잘 어울릴 것 같다.
계곡은 청징(淸澄)하고 수려하다. 물소리를 곁으로 들으며 걷는 산길은 한없이 부드러워 그다지 힘든 줄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나 쉽게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군의 경계를 이루는 안부 밀재라는 곳에 올랐다. 여기부터 우측 오름 길은 경사가 비교적 가파르고 암릉이 간간이 섞인 능선을 타게 되는데 암릉코스는 오히려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암반도 촉감이 부드러워 즐거운 기분을 간직하며 산행을 계속할 수 있다. 능선에는 입석바위, 촛대봉 등 삐죽한 모습들이 즐비하며 정상이 되는 봉우리도 잘생긴 형상으로 우뚝 솟아있다. 용추골의 담소(潭沼)들과는 ‘높이 솟음과 깊이 팸의 아름다움’ 즉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집도 절도 없는 깊은 산속에 야밤을 틈타 찾아올 사람은 없을 것이나 달빛이 잘 어우르는 고즈넉한 밤이 깃들이면 월영대의 넓은 반석에 능선 위에 있던 새바위 등 솟은 봉우리들과 용추골의 깊은 담소들이 소리 없이 몰려들어 질탕한 사랑의 향연을 벌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때그때 기승절경(奇勝絶景)을 빚어내어 우리에게 새롭게 선보이는 것은 아닐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완만하게 높아지는 다래골 쪽 등행(登行)과는 달리 피아골 방향으로의 하산 길은 골이 깊고 경사가 급하게 내리꽂는다. 다소 주의를 기울여야 하나 지반은 역시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미끄럼만 좀 신경 쓰면 안전에는 이상 없을 듯하다. 월영대 합수점에서 오르던 길을 다시 만나 따라 내리다가 용추를 가까이하고 한 번 더 봐두는 게 좋다. 누가 뭐라 해도 대야산의 경관은 용추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산길, 깨끗한 계곡과 청아하게 흐르는 물소리, 아기자기한 재미가 솔솔 이는 암반 능선 타기. 모두가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쏙 든다. 능선 위의 촛대바위들도 그 점에 대하여 흐뭇해할 것이다. (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