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등봉에 더덕향기 날리고
산길을 가다가 더덕 냄새가 짙게 풍겨오면 누구나 두리번거리며 우선 그 뿌리를 캐 손안에 넣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따라간 고원산악회 고정회원들은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격으로 산행도 즐기겠지만 그것보다 더덕을 캐러 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대부분 생김은 조금씩 달라도 간편하게 개량된 호미 모양의 약초 캐는 연장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으며 산행을 하다가는 여기다 싶으면 언제든 대열을 이탈하여 산자락을 파헤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톡 쏘는 더덕의 약초 향이 물씬 실려 오는 것이었다.
샛등봉(885m)은 경기도내에서 가장 높은,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경기지방의 지붕이라 부르는 화악산(1,468m) 정상 서쪽으로 형제처럼 나란히 응봉(1,436m)이 솟았는데 거기서 뻗어 내린 여러 지능선 중 손자뻘 되는 봉우리이다.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화천군을 잇는 백운산과 광덕산 사이 험하기가 대관령과 진배없는 광덕고개를 힘겹게 오른 후, 저 너머 사창리로 뚝 떨어져 화천강으로 흐르는 용담천을 끼고 가다가 사내면에 이르러 우측으로 까마득하게 올려 보이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샛등봉을 오르기 위하여 우선 용담천을 건너야 하는데 이 내는 물이 많고 또 어느 지점은 꽤 깊은 편이어서 빠지지 않고는 달리 건널 방법이 없다. 옷이 젖지 않도록 하려면 벗어야 하고 벗기가 무엇하면 옷이 젖는 것을 감수해야 하니 한동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망설이고 있어야 했다. 나이 지긋한 몇 사람은 노련함의 발로인지 아니면 몰염치한 탓인지 어느새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유유히 물을 건너가는 순발력과 용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 밖의 대다수는 우왕좌왕하다가 발만 벗고 옷을 최대한 걷어 올리고 들어선다. 물속에서 밟히는 이끼 낀 돌들은 몹시 미끄러워 빠르게 흘러가는 물살 속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가누며 혹시 돌부리에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걷어 올린 옷 위까지 물이 차는 곳도 있어서 결국 바짓가랑이가 젖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산길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태고의 정적이 감도는 원시의 분위기다. 빼곡한 숲에 가려 좌측 망단리계곡은 전혀 시야에 가려있었지만 들려오는 물소리로서 어디쯤 위치하리라는 가늠은 되었다.
오늘의 산행에 참여한 나의 동료들은 굳어있던 몸들이 차차 풀리면서 선두그룹으로 급부상하였으나 선두리더 뒤를 바짝 쫓는 한 중년 부인의 날렵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단신으로 참여하는 여성 중에는 꾸준히 선두리더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간격을 유지하며 산행을 끝까지 하는 사람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만큼 산을 좋아하고 또 자신이 있으니까 여자로서 선뜻 혼자 나섰을 것이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초목은 한껏 우거지고 깊은 산일수록 잎들이 빽빽하게 뒤덮고 있어 숲속은 언제나 침침하고 음습하다. 널려 있는 바위에는 청태(靑苔)가 끼고 풀 나무 꽃 하다못해 발길에 풀썩이는 낙엽 더미 속에서도 독특한 향취가 풍겨 나와 맡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풍긴다더니 더덕에서는 더덕의 톡 쏘는 향기가 날리고 잔대에서는 틀림없이 잔대의 무덤덤한 냄새가 나고 있다. 꽃철이 많이 지났음에도 어디서 풋풋한 진달래꽃 냄새가 코끝에 스쳐, 진원을 탐색하니 진달래 나무의 싱그러운 새순 부분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빚어놓은 조물주의 완벽한 솜씨도 놀랍거니와 무색무형의 냄새조차도 달리 풍기게 하는 초능(超能)의 창조력 앞에 숙연할 뿐이다.
706미터봉과 샛등봉 정상을 잇는 능선 바로 밑에 이르러 선두그룹이 각개약진으로 흩어져 본격적인 더덕 캐기에 나서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이 틈에 끼어 잔뿌리 몇 개씩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진동하던 더덕 냄새가 몸에 배어있기라도 한 것인가. 계속되는 산행 중에도 그 향을 심심찮게 맡을 수 있었으니. 더덕의 생김이야 대부분 잘 알고 있는 터이지만 그것만 믿고 실제로 캐보겠다고 덤볐다간 빈손이기 십상이다. 비슷한 잎들이 많아 도무지 막연하고 확신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찮은 것이라도 해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대단한 것이다.
갑자기 뒤쪽에서 “뱀이다!”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그것은 벌써 리더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칠점사라는데 독이 잔뜩 오른 듯 머리 모양이 세모꼴이다. 산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먹어서 자양분이 풍부하고 약이 되는 것들도 널렸지만 이와 같은 독사를 비롯하여 거미 지네 등 독이 있는 동물과 독초들도 함께 포진하고 있다. 자연히 외부의 무분별한 접근에 대한 방어 관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봉화 터로 추측되는 두 평 남짓의 정상은 우리 일행 5명으로 꽉 차는 듯하여 속속 올라오는 뒷사람들에게 자리도 물릴 겸 앞으로의 행로를 대강 알아보고 리더보다 앞서 출발했다. 샛등 주능선을 따라 줄곧 내려가되 종국에는 오른쪽 골짜기로 빠지는 것 잊지 말라는 리더의 당부가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우측으로 갈라지는 희미한 길이 열렸으나 가다 보면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계속 내달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기대했던 제2의 갈림길은 또다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꺾여나가고 있었다. 그대로 따랐다가는 목표지점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것이므로 우리는 비상수단으로 오른쪽 골을 향해 ‘길 없는 길’을 개척하기로 했다.
녹음이 짙은 한여름 밀림 속은 시야의 폭도 좁고 어지럽게 뻗친 잔가지들과 엉켜있는 덩굴을 헤집고 나가야 하니 긁히고 쓸리는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자주 부딪는 덤불 뒤쪽은 사각지대로서 자칫 잘못 들었다가는 막다른 절벽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미심쩍으면 으레 우회하곤 하니 힘은 배도 더 드는 것 같다. 고행 끝에 음침한 숲을 벗어나 대명천지를 맞는 기쁨은 또한 큰 것이었다.
용담천을 다시 건너올 때의 사정은 갈 때와 전혀 딴판이 되었다. 산행을 마무리 지을 때는 몸을 씻어야 개운한 것인데 마침 물을 만났으니 이번에는 주저 없이 벗어부치고 뛰어들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몸도 식히고 내도 건너는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가.
리더는 몇십 년은 묵었을 만큼 큰 더덕을 무성한 줄기와 함께 보여줘, 새끼손가락 굵기 몇 뿌리 캐 들고 좋아했던 우리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밖에도 돼지감자, 잎이 유별나게 큰 취, 잣송이 등을 얼마씩 채취해와 귀로의 차 안에서 하나하나 선보이며 상당한 수준의 전문가적 지식으로 생태와 효능 등의 설명을 덧붙였다. 그 사이에도 더덕 냄새는 간간이 퍼졌으며 이 향취의 여운을 되새기며 나도 간단한 더덕 캐기 도구를 장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