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호반 제비봉
아침 6시 30분, 집을 나서는데 한기가 확 끼치며 꽤 선선한 느낌이다. 태풍을 동반한 비가 물러간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 영향권을 못 벗어난 탓일까. 긴팔 셔츠에 조끼까지 덧입었는데도 한때 몸이 으스스 떨리고 움츠러들 정도다. 집결지 동대문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마침 히터가 들어와 곧 굳은 몸을 풀 수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 제비봉의 포인트는 산 위에서 굽어보는 충주호의 시원한 경관이 일품이라는데,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할지 자못 궁금하다. 산악회 버스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거칠 것 없이 달려나가니, 이천(利川)의 황금들판이 차창으로 꽉 차게 들어온다. 선선하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는 이미 가을의 문턱을 훌쩍 넘어선 것인가, 길가에 화사하게 핀 코스모스 대열의 몸짓이 한가롭고 누렇게 익어 넘실대는 들판은 풍요를 예고하는 듯하다. 산을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도 서서히 옷 갈아입을 준비를 끝낸 듯한 분위기이다.
충주시 외곽을 경유 충주호 남쪽 36번 도로를 산허리로 끼고 돌아 단양까지 8킬로 되는 지점, 충북 제원군 수산면 장회리의 장회나루터 부근 산행 기점에 도착한 것은 서울 출발 3시간 반 만인 11시 15분경이었다. 우리가 오늘 오를 제비봉 능선이 급경사를 이루며 우뚝 솟았으나 정상 높이가 불과 721미터로 가벼운 산행이 될 것으로 예견된다.
제비봉 주변은 송이버섯 자생지라는 산악회 대장이 흘린 말을 새겨두고 있었는지 대원들 대부분이 산릉에 올려 붙기가 무섭게 그 방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빛이 역력하다. 혹시나 하고 소나무 주변을 헤집어 보며 지나기도 한다. 산 초입에서 한 현지 채취인을 만나 자연 송이를 2킬로나 땄다고 자랑하는 말을 들어 일행들의 마음은 더욱 들떴을 것이다.
송이라면 귀하기로 산삼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인데, 이곳이 ‘송이버섯 자생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고 일행 중 누군가가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그것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는 정도로 끝내며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우리는 송이버섯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을 즐기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근 산세가 대부분 깎아지른 듯이 수직에 가까운 경사여서 오르느라 숨결 고르기에도 바빠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오늘은 집사람에게 사줬던 스틱을 시험 삼아 가져왔다. 아내를 산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등산화와 함께 이 지팡이를 기본 장비로 사주는 등 갖가지 공을 들였으나 그 약효는 몇 번 따라나서 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요즈음 내 무릎 관절이 안 좋은 듯하여 오늘 그 지팡이를 쓰기로 한 것이다. 무릎은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쉽게 낫지 않고 그 통증이 길게 지속한다. 스틱은 그동안 쓴 적이 없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들고 다니기가 어색하고 또 거추장스럽다. 그래도 다리에 대한 부담을 한결 덜어줘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높은 곳으로 이동할수록 호반에서 멀어지며 시야가 미치는 범위는 점차 확대된다. 지난 7월, 극심한 가뭄이 있은 직후 하설산(夏雪山) 가는 길에 보았던 충주호는 바닥이 거의 드러나다시피 물이 빠졌었는데 이제는 거의 만수위에 올라있다. 호면에 하얀 포말(泡沫)의 꼬리를 달고 지나다니는 유람선에서 울려오는 안내방송 소리는 높이 오를수록 우렁우렁 크게 울리고 있다.
정상은 그다지 넓지 않은 바위지대였다. ‘제비봉’이라 쓰인 널빤지가 아담한 크기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단양산악회에서 해놓은 정상 표석은 박은 지 오래지 않은 듯 말끔하다. 불과 1시간 20분 만에 정상에 다다랐으니 오늘 산행은 멀리 찾아온 양으로는 너무 가볍게 끝나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게 화를 자초했는지 결국은 5시간을 걷게 되었다.
정상에서 약 20분을 쉰 후 인솔 대장이 택한 하산 길은 처음 설명에서처럼 일단 되짚어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인 것으로 감이 왔다. 그래도 대장이 알아서 하는 인솔이니까 우회로로 가는 모양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단지 새길을 밟게 되는 것만 좋아 따라갔다. 더욱이 이 길은 송이가 있을 법한 소나무 숲이어서 가끔은 얌전히 덮인 솔잎 밑을 헤쳐보기도 하지만 횡재의 기회는 누구에게도 오지 않았다. 길 선택은 역시 잘못됨으로 판명되어 얼마쯤 가다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다.
내림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하며 새로운 산봉우리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유하기로 되어있는 545미터봉이라는 대장의 답이었다. 정상에서 처음에 오르던 길로 5백 미터쯤 내려가며 삼거리가 나타났는데 여기가 산행을 시작하여 능선을 따라 올랐던 길과 545봉 쪽으로 향하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줄곧 평탄하고 부드럽던 흙길이 암릉으로 바뀌며 걷기에 부담스럽다.
커다란 바위들 사이를 돌아 오르자 비로소 545봉이 나타났다. 고도는 비록 낮으나 이곳에서의 전망이 정상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좋다. 암반에 뿌리를 내리고 분재의 그것들처럼 모질게 자란 소나무들의 모습이 빼어나고 그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충주호는 멀리 왼편으로 기암의 구담봉과 옥순봉을 끼고 있다. 호반 건너편으로는 금수산의 연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가운데 유람선이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심심찮게 지나다니는 풍광은 일품이다. 길을 잘못 들어 한때 뒤틀렸던 심사가 봄눈 녹듯 스르르 풀렸다.
역시 좋구나! 잘 왔다! 참 멋있다! 짤막짤막한 탄성들이 다구동성(多口同聲)으로 난무한다. 발아래로는 깊디깊은 골을 형성하며 거대한 칼의 날같이 날카로운 바위 능선이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뻗어 내려가고 있는데, 이런 모양의 능선이 제비의 양 날개와 꼬리처럼 세 폭이나 펼쳐있다. 그래서 날개를 펼친 채 치솟는 제비 형상의 머리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이 능선들이 모이는 꼭대기를 제비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저와 같은 모양들은 애초에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을까? 둘러보다가 내려가고 내리다가 멈춰 서서 또 둘러보곤 하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처지기가 일쑤였다. 조망하는 지점과 방향에 따라 모두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대자연의 걸작들. 산을 다 내려와서 연봉들을 다시 본다. 오르기 전 이 산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와는 전혀 다른 감회가 어린다. 이렇게 해서 또 하루, 즐거운 추억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