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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24)

by 김헌삼 Mar 21. 2025


 남한산성 노송들     



  한겨울,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향하여 산길을 오르는 마음은 어수선하고 착잡하다. 병자호란 당시 우리 선조들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 겪은 피눈물 나는 고난과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히 다른 계획이 없는 휴일 주로 남한산성의 오솔길을 오른다. 그날 낮 꼭 볼일이 있어 산에 갈 형편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집 가까이 있으므로 그만큼 일찍 나섰다가 빨리 돌아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산성은 빤히 보이고, 산 위에 올라 성곽 위에 팔을 걸고 조망(眺望)하면 바로 아래 펼쳐있는 송파 벌에 나의 아파트가 반긴다. 그래서 정상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자리 잡은 정상이 해발 496미터로서 그다지 높지 않지만 가팔라 만만치도 않은 남한산성의 산길을 수시로 찾아간다. 대부분 수어장대까지만 갔다 돌아온다. 하루를 온전히 할애해도 좋을 때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성 둘레를 완전히 한 바퀴 돌기도 한다.

  한수(漢水) 또는 한양(漢陽) 남쪽에 위치하여 남한산(南漢山), 평지보다 3,4백 미터 높은 지대로서 해를 오래 볼 수 있다고 일장산(日長山), 이와 같은 의미로 낮이 길다는 이름으로 바꿔 주장산(晝長山)이라 한다. 그러나 오래 들어 귀에 익은 ‘남한산성’이라는 산과 성과 분지마을을 뭉뚱그려 부르는 지명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친숙하다. 그래서인지 남한산성에는 백제, 신라, 조선으로 연면히 이어온 사적의 향취가 그윽하게 배어있다. 수치와 오욕으로 얼룩진 역사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이니 냉엄한 심경으로 돌아와 더듬어 본다.

  요새 형의 지세로 인하여 백제는 온조왕 13년(BC 6년) 이 부근 하남으로 수도를 옮기고 토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남한산성의 시초일 것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도 축성기록이 있으나 지금 규모의 석축산성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증·개축해서 인조 4년(1626)에 완성된 것이다.

  광해군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축성에 힘쓰는 한편 명나라와 후에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 사이에서 눈치 외교를 펴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으나 인조반정 이후의 정국은 친명반청(親明反淸) 일변도 외교로 급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명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후금과의 관계만 나빠졌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을 당하며 형제국의 맹약을 맺게 되었고, 후금의 태종은 군신지의(君臣之義)로 조선의 지위를 더 낮추며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하여 국내 신하 중에는 최명길 등 화전론자(和戰論者)도 있었으나 믿을만한 힘도 없으면서 국교를 단절하고 대항하는 강경정책을 폈다.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이라 하고 마침내 인조 14년(1636) 12월 2일 10만 대군을 이끌고 9일 압록강을 건너 이 땅에 침입하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4일 후인 13일에야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청군이 개성을 통과할 때인 14일 허겁지겁 강화도로 피병(避兵)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때 우리 측은 군병 1만 4천여 명과 약 50일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을 뿐이었다. 

  국론은 분열되고 조정은 우왕좌왕하니 청병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서울을 점령한다. 부녀자를 농락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하며 재물을 약탈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한산성을 수비하던 조선 군사들은 수차례 기습공격을 감행해보기도 하였으나 별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40여 일간 수성항전(守城抗戰)만 계속하였다. 그사이 군량은 고갈되고 혹독한 추위마저 엄습하여 천혜의 지리(地利)마저 무위로 돌아갔다. 급기야 항복하고 청의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수락해야 했던 것이 1,637년 1월 30일의 일이다. 인조는 수성(守城)하며 버텨본 지 47일 만에 부득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三田渡)에 마련된 수강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할 때마다 세 차례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이른바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하는 항복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아마 우리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치욕적인 항복의 의사표시였을 것이다.

  삼전도에서 남한산성 사이 송파 벌에 빽빽하게 들어차 이 시대를 사는 인총(人叢)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이입해온 사람들이겠지만 그중에는 350여 년 전 청군의 온갖 억압과 만행 속에서도 잡초처럼 살아남은 백성들의 후손들도 다수 섞여 있을 것이다.

  거여동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가 된다. 여기 조금만 지나면 남한산성의 산밑에 닿게 된다. 산성 서문과 좌우 양쪽으로 약 5백 미터, 1킬로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암문이 있는데 이들 문을 향하여 넉넉잡고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급경사의 산행코스가 서너 개로 갈라진다. 휴일에는 주로 강동, 송파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부부가 짝을 이뤄, 또는 아이들을 이끌고 많이들 찾아온다. 그러나 막연하게 올라가서 하지 말라는 성곽을 타고 앉아 멀거니 전망이나 내려다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뼈아픈 역사를 돌아보고 조상들이 겪은 고초와 한(恨)을 우리 가슴속에 새기며 드높은 자주와 호국의 결의를 한층 더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성안으로는 잘 큰 노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하나 같이 싱싱하고 높다랗게 자라 여름에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그늘을 주고 겨울이면 흰 눈 더미를 이고 있는 모습이 의연하고 아름답다. 

  이 늙은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역사의 산증인을 대하는 기분이다. 수백 년간 선 자리에서 모든 것을 묵묵히 수용하며 낱낱이 지켜봤을 노송들로부터 하나하나 이야기를 듣듯이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고 긴 앞날을 내다보는 정책의 필요성과 유비무환의 교훈을 아로새겨 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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