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질풍 속에서
소백산(小白山 1,439.5m) 탐방 길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 찾았던 때로부터 10여 년이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때는 5월 말경으로 철쭉꽃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아직 봉오리가 터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소백산 철쭉이 그 명성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자주 내린다. 어젯밤에도 설악산 등 영동지방에는 많은 눈이 왔다지만 소백산도 그렇잖을까 했는데 우리를 안내할 리더가 미리 알아봤는지 이곳은 아니라 한다.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혀 가다가 되돌아오는 불상사는 없겠거니 안심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설경의 진수를 보기는 글렀구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1월의 중순이니 그동안 내려 쌓인 것이라도 덮여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죽령을 넘으며 간간이 모래가 덜 뿌려진 빙판길에서 차들이 가다 서기를 반복하였으므로 예정보다 한 시간쯤 지체되어 비로사 입구 매표소에 도착한 시각이 12시였다. 잠실역에서 관광버스에 몸을 실어 출발한 시각이 7시 반이었으니 4시간 반 만이다. 이제부터 산행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언제 올랐었는지 벌써 하산하는 사람들도 많다. 역시 한겨울에 큰 산을 대하는 만큼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다. 1.4후퇴 때 밀려오던 중공군 차림보다는 훨씬 세련되었겠지만 두툼한 모습에는 큰 차이가 없다.
처음 떼어놓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무겁다. 아니나 다를까 곧 뒤로 쳐지기 시작하니 저 높은 곳을 제대로 갈 수 있을지 염려된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초조해하거나 급한 마음에 페이스를 잃으면 역효과다. 스스로 풀릴 때까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묵묵히, 그러나 꾸준히 걷다 보면 따라붙을 기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안다. 앞서가는 사람들과의 차이가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퍼져 주저앉아 있지만 않으면.
산 밑쪽은 언제 눈이 내렸냐 싶게 맨송맨송하더니만 우리가 지금 오르는 쪽 멀리 국망봉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이루는 능선과 그 자락은 히말라야를 연상하리만큼 하얗게 덮여 있는 것이 늠름한 모습이다. 아까부터 줄기차게 귀를 때리는 우레 같은 저 소리는 산을 통째로 밀어내기라도 할 듯한 기세의 초 강풍이다. 바람은 앞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산을 뚫고 지나고야 말겠다는 듯 계속 골짝으로 불어댄다. 산은 이에 밀리면 끝장일세라 꼼짝달싹 않고 버티니 맞부딪는 소리만 점점 요란하다. 그 기세에 한없이 움츠러드는 것은 그사이 낀 한갓 나약한 인간이다. 우리는 능선 기슭으로 숨기듯이 자세를 한껏 낮춰 걷고 있었으므로 아직 바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오지게 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 멀리 우뚝 솟은 비로봉은 잘생긴 세모꼴에 티 없이 깨끗한 백두(白頭)의 형상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닥의 눈은 많아지고 있다. 이제는 미끄럼을 예방하기 위하여 아이젠을 착용해야겠다.
어느덧 나무마다 상고대가 피어있어 마치 화창한 4월 만개한 벚꽃처럼 환하다. 하늘은 구름 한두 점만 한가로이 떠 있어 파란빛이 더욱 선연하고 주변은 모두 하얀 것이 환상의 꽃 터널 속이다. 자연 지나는 사람들 표정 또한 모두 언제 움츠리기나 했냐는 듯 활짝 핀 모습이다.
정상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아늑한 자리에 잠시 쉬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멀리서 볼 때는 티 하나 없이 하얗던 정상 부근이 가까이 다가가니 사람들이 까만 점으로 떼 지어 오르고, 꼭대기에도 많이들 늘어서 있다. 오후 2시. 정상에 선 순간 기다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퍼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북쪽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온다. 사정없이 때려 잠시도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이며 떠밀려 날아갈 것 같아 한 걸음 떼어놓기가 힘겹다. 두 발을 뿌리박듯 하고 버텨보지만 그대로 서 있기도 어렵다.
정상 부근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요동치는 바람 속에서 자리를 쉽사리 뜨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온 정상인가 하는 마음으로 최고봉에 도달하면 잠시라도 머무르며 꼭대기에 있음을 즐기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이 강풍과의 맞대결이라 편안한 자세가 아니어도 누구도 그냥 지나치려 하지 않는다. 최고의 자리란 그런 것인가 보다.
정상을 뒤로하고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하산하는 코스가 보통 때와는 달리 오늘은 가장 험난하다. 질풍이 마침 우리가 내려가려는 방향에서 정면으로 노도처럼 불어 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 큰 나무도 별로 없어 거칠 것 없이 질주해오던 바람과 맞닥뜨리는 최초의 장애물이 바로 우리인 모양이다. 이에 맞서 결전을 불사하려고 오기를 부렸다면 무참히 패하여 여기저기 낭자하게 나뒹굴었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투항군이 되어 자세를 한껏 낮추고 설설 기듯 길게 놓인 나무계단과 그 양쪽으로 설치된 가드레일의 굵은 밧줄을 생명줄처럼 꼭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갖은 포화와 총탄이 빗발치는 무방비의 전장에서 탈출하는 패잔병 상이었다. 세찬 바람이 끊임없이 몰려와 모질게 후려치고는 총총히 사라져갔다.
아래쪽으로 보이는 조립식 건물이 유일한 엄폐물이었으므로 거기까지는 어떠한 고통도 인내하며 도달해야 한다. 빤히 보이는 그곳 도달하기가 왜 그처럼 힘겨웠던가? 이 건조물은 주목군락 감시초소로서 그 안에는 발 들여놓을 틈 하나 없을 만큼 사람들이 꽉 들어차 바람을 피하고 있었으며 우리도 잠시 이곳에 머물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한기가 엄습해오며 추위가 온몸으로 파고드니 곧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버릴 것 같다.
이제부터는 길을 잘 짚어나가야 한다. 리더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리송한 갈림길이 앞에 놓여있으니 여기서 만약 엉뚱한 곳으로 흐른다면 미아가 될 것 같다. 미리 나눠 받은 지도상에 천동리 쪽이 하산 방향이었으므로 이 길을 놓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초소에서 얼마 안 떨어진 능선 서북쪽으로 향하니 이곳은 바람이 미치지 않는 숲 지대로서 아름드리 주목 군이 간간 눈에 띈다. 생천사천(生千死千)이라 더니 천 년 이상 묵었을 품격과 우람함이 나무마다 배어 있다.
급경사를 타고 내려올수록 강풍이라는 점령군과는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세찬 칼바람 소리는 아득한 곳의 포성처럼 멀어 갔다. 이제는 주저앉아 미끄럼 타고 내려가며 평화의 노래를 불러도 되리라 싶었지만 올라오는 사람과 자주 마주치게 되니 그런 재미도 접어야 할 것같다. 다만 정상 부근 능선에서의 질풍노도 속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자로서의 안도감에 젖어볼 뿐이다.
소백(小白)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태백산(太白山)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은 만큼 하산 거리도 만만찮다. 정상까지 올라간 시간과 맞먹게 걸려 총 4시간의 산행이었다.
그동안 리더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했더니 산행 입구에서 버스를 돌려 내오기 위하여 주변에 무질서하게 주차된 차들을 여러 대 옮겨놓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겨우 맞춰 하산지점에 차를 댈 수 있었다 한다.
무슨 원수진 일이 있다고 소백산의 바람은 성난 파도처럼 미친 듯이 달려와 그렇게 날려 보낼 기세로 우리를 못살게 굴었을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길이길이 남겨주려는 것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