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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26)

by 김헌삼 Mar 22. 2025


꽃길 따라 칠갑산까지     



  봄이 되면 올림픽대로 변 화목(花木)들에서 가장 먼저 꽃이 핀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24시간 끊임없이 다니며 내뿜는 자동차들의 배기가스 열이 항상 길가에 머물고 있어 어느 다른 곳보다 일찍 꽃을 피울 것 같다. 진달래와 개나리는 어느새 시들해지고 개량 철쭉의 검붉고 작은 봉오리가 이미 피어난 잎들 사이에서 곧 벙글 태세이며 빼곡히 박힌 모양이 산뜻하다.

  우리를 실은 문화관광이 올림픽대로를 벗어나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했을 때는 8시가 좀 지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공사 구간이 빈번해서인지 달리는 것이 어째 시원스럽지 못하고 정체가 잦다. 그렇다고 노변 어디에 특별히 눈을 줄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차내 사람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임 시간에 대어 나오느라 설친 새벽잠이라도 보충하려는 듯 늘어진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다.

  소통이 순조로울 때는 서울서 통행시간이 1시간이면 충분했는데 2시간이 좋게 걸려서야 겨우 천안을 벗어나 공주로 향하는 국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길이 넓지도, 훤히 트여있지도 않았지만 한적하여 막힘이 없으며, 돌아가는 산모퉁이 띄엄띄엄 엎드려있는 농가들 주변으로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 속에 진달래, 개나리는 물론 앵두, 살구 복사꽃 등이 화사하게 피어있다. 이제야 답답하던 가슴이 비로소 시원스레 트이는 기분이다.

  지금 찾아가는 청양의 칠갑산(七甲山)에 대하여는 많은 이들이 같은 이름의 노래가 있다는 것쯤은 알아도 산이 어디 위치하는 것조차 모르겠는 반응이 월등했다. 나로서는 노래가 있기 훨씬 전에 이번 산행의 시발점이 되는 한치고개를 굽이굽이 넘은 적이 있다.

  대학에 들어가던 해 4.19가 일어나며 당분간 학교가 쉬게 되자 나는 바람도 쐴 겸 대전 숙부댁에 들렀다가 보령 고향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른 들판을 지나고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을 바라보며 몇 굽이인가 돌고 나니 한적한 깊은 산골에 들어와 있었다. 버스는 산기슭으로 닦여진 비포장 길을 따라 급격한 비탈 위쪽을 향하여 기 쓰며 오르고 있어서 이리 내둘리고 저리 쏠리는 몸을 추스르며 버텨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한편으로는 탁 트인 전망과 골짝마다 구름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벚꽃 등의 환함, 반대편 소나무 숲 사이로 여인의 속옷 자락처럼 은밀하게 내보이던 진달래꽃들의 수줍은 미소는 뿌듯함이 온몸으로 전류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케케묵은 인상이나마 한 자락 남아있으므로 해서 ‘칠갑산은 4월 말과 5월 초에 온산을 붉고 하얗게 물들이는 진달래와 벚꽃군락이 특이하다’는 찬사에 선뜻 수긍할 수 있었다. 기왕이면 이 시기에 맞춰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산 주변은 충남 땅에도 이런 오지가 있었나 싶게 겹겹 산중이다. ‘충남의 알프스’라는 어떤 기사의 타이틀에는 어느 정도 과장됨이 있어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수직이다시피 한 비탈 바위 모퉁이를 돌아가려 할 때 높다란 암벽 사이에 뿌리내려 꽃 피운 몇 송이의 진달래가 유난히 곱다.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따라가던 수로부인 눈에 띄어, 갖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 꽃, 한 노인이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진댄,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며 기꺼이 헌화한 멋과 풍류. 먼 옛날의 일이 문득 떠올라 주위를 살폈으나 다행히 그 꽃을 갖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이는 이는 없다.

  진달래가 산야에 어떤 형태로든 피어있는 것을 보면 그저 곱고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향수가 어린다. 철없던 시절 동네 산들을 휘젓고 다니며 꽃 방망이를 만들어 뜯어먹기도 하던 추억이 되살아나고, 큰 나무들 사이에서 또는 암벽 틈을 비집고 모진 생명을 이으며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연분홍 빛깔과 뭉텅이로 피는 꽃 모양의 애처로움이 아련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대치터널을 불과 10여 미터 앞두고 오른쪽으로 ‘칠갑산 도립공원’이라는 안내표지가 있으며, 이 도로는 보기에도 급하게 오르는 산길이다. 터널이 뚫리지 않았던 때 한치[大峙]고개를 넘던 옛 그 국도임을 알 수 있다. 길가에는 수십 년 또는 백 년 가까이 묵었다는 벚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나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상태로 있다.

  산 정상의 높이는 561인데 우리가 하차한 한치고개 만해도 4백여 미터는 되는 것 같아 멀리까지 와서 필요한 만큼 걸어보지도 못하고 시시하게 끝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더욱이 여기부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 길은 차량도 넉넉히 다닐 수 있을 만큼 넓게 이어져 차라리 소풍 나온 기분이었으며, 사실 그런 차림의 가족 단위 행락객들이 다수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정상을 얼마 남겨두고는 넓던 길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고지로 향하는 길답게 가파르고 오르느라 땀도 꽤 흘려야 했다. 정상에서 능선 따라 좀 내려온 지점 삼거리에서 삼형제봉을 후딱 다녀온 뒤 장곡사 방향으로 빠지는 오솔길에는 한껏 모양을 내며 푸르르게 자란 소나무들 사이로 꽤 먼 길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뻗어 있다. 임간(林間)에 피어난 진달래의 분홍과 산수유의 노란색이 특히 눈길을 끌었으며 발부리에는 양지꽃, 제비꽃, 할미꽃 등 작은 것들이 길가 풀 섶, 나무 밑 등 햇볕 좋은 곳에 줄줄이 돋아나 발걸음을 한결 경쾌하게 한다.

  산은 비록 높지 않아도 천장계곡 아흔아홉계곡 냉천계곡 강감찬계곡 백운계곡 등 많은 계류를 포용하는 등 깊이 있는 산답게 정상 이후의 산행길이 길고 아기자기하여 역시 전문가가 선택한 코스에 이상 없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하산을 끝내는 지점에 신라 문성왕 12년(850) 보조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천년 고찰 장곡사(長谷寺)가 장곡천 위쪽 아늑한 곳에 터 잡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상, 하 두 개의 대웅전이 각각 향을 엇비슷하게 자리 잡은 것이 이채로우며 그밖에도 불상, 대고(大鼓), 통나무그릇 등 볼거리들이 많다는데, 귀중한 것들인 만큼 차근차근 둘러봤으면 했으나 그럴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이 없는 게 아쉽다.

  다만 현존하는 사찰건물의 고색(古色) 속에서 묻어 나오는 역사의 그윽한 냄새와 절 주변 초목들에 새롭게 피어난 꽃과 잎들에서 풍기는 신선한 향기 사이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만들어 놓은 것과 자연 그대로의 것과의 절묘한 조화를 보고 느끼며 마음속 깊이 새겨둘 수 있었다는 것으로서 5백여 리 꽃길 여행의 진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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