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로 대신한 두위봉 철쭉산행
두위봉을 향하면서 이 산행을 ‘비에 젖은’이라는 말로 수식할까 ‘비에 젖을 뻔한’으로 물러설까, 기상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따라 생각도 오락가락한다. 기상청의 예보는 천둥 번개 치며 비가 많이 올 것이라고 했다는데 밤사이는 물론 집을 나설 때까지도 고요하다. 그러나 받아놓은 통보이니 폭풍전야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그것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의 그림자가 떨쳐 지지 않는다.
우리가 탄 버스가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서 광주쯤 갔을까, 아마 광주를 지나 이천을 향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앞창에 이슬처럼 맺히던 빗방울이 점점 억수로 변하여 와이퍼가 빠른 속도로 돌아갈 때는 두려움을 넘어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55번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탈 무렵,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땅바닥이 보송보송한 것으로 급격히 변하는 것을 보고서는 다시 안도하게 되었다.
일사천리로 달리던, 곧고 한적한 길을 제천 나들목에서 벗어나 시내를 지나치며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되는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든다. 실은 작년 올 사이 이쪽 지방에 세 번째 오는 발 길인데 번번이 생소한 느낌이다. 남면사무소를 지나 강원랜드 방향과 민둥산 가는 길 표시를 보며 아, 지난번에 지나간 길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굽은 길을 반듯하게 펴고 노폭(路幅)을 넓히는 도로공사를 위하여 차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하게 오가고 있지만, 공정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는 가늠이 안 된다.
우리가 산행을 위하여 하차한 곳은 태백선의 증산역에서 얼마 안 되는 자뭇골 앞이었다. 두위봉을 오르내리는 코스는 모두 4개가 있다. 이들에게는 번호가 붙었는데 소요시간과 참가회원들의 한계 체력, 구름 낀 하늘에서 언제 뿌릴지 모르는 비 등을 고려하여 자뭇골-척산골-샘골을 따라가는 제4코스로 올라 정상을 밟은 후, 하산은 철쭉군락지를 거쳐 감로수 샘터로 해서 단곡계곡으로 빠지는 제1코스를 택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주목 군락지는 이번 산행에서 빠지게 된다.
97년 직장 동기들 등산모임에서 이 산을 찾았었다. 다행히 그때의 기록이 있어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점에서 오늘과는 달랐다. 우선 시기적으로 20일 가까이 늦은 6월 15일로 ‘더없이 맑게 갠 하늘’이라는 메모가 있다. 크게 다른 것은 자미원역 쪽에서 문곡리를 거치는 제3코스로 올라 주목 군락지가 있는 제2코스 도사곡으로 하산했었다. 이번에는 결과적으로 그때 안 해본 코스를 고른 것처럼 되었는데 도사곡 코스의 국내 최고(最古) 주목들을 못 보는 아쉬움이 크다. 이곳의 주목들은 1,800여 년 묵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목(古木)이다. 우람한 둥치가 굳건하게 뿌리박고 서 있는 당당한 모습이어서 10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서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산행에서 이에 대신하는 소득이라면 심심찮게 맞닥뜨리는 야생화들의 곱고 예쁜 자태였다. 초입 냇가 둑에서는 엉겅퀴가 눈길을 끌었다. 어린 시절 논 가장자리나 덤불에서 만나는 엉겅퀴는 온몸에 돋은 억센 가시 때문에 멀리하던 잡초였다. 그러나 지금은 털과 가시에 톱니 모양을 하고 억세어 보이는 잎과 줄기 가운데 피어있는 자홍색 꽃에서 풍기는 힘차며 산뜻한 풍모(風貌)에 오히려 매력을 느낀다.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홍자색 앵초와 자줏빛 벌깨덩굴 꽃이 음습한 푸르름 속에서 번갈아 나타나 주변이나 보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해준다. 벌깨덩굴 꽃은 전에 함백산이었던가 아니면 민주지산인지 확실치 않지만 높은 능선 길가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그 청순한 빛깔과 미태(美態)를 어여삐 여기면서도 무슨 꽃인지 몰라 안타까워했던 기억이다. 이번에 다시 만난 반가움에 영상에 담아 ‘?’ 표시로 공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행했던 친구 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어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야생화들은 생김과 크기가 각양각색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며 앙증맞고 귀엽기도 한데 놀라고는 한다. 자주 대하면서도 이름을 아는 것이 별로 없어 한 번 더 놀란다. 그래서 들꽃 이름 하나 알게 되는 즐거움은 자식 하나 얻는 기쁨만큼이나 크고 뿌듯한 것이기도 하다.
두위봉은 정상부근의 철쭉군락이 유명한 산이다. 이 무렵 산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철쭉을 볼까 하는 기대감이 크다. 만개로부터는 이르거나 늦는 것이 다반사임에도 이날만큼은 때에 적절하게 맞춰 왔으리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 아마도 1주일 내지 열흘 정도 일찍 찾아온 것 같다. 그래도 늦는 것보다 빠른 쪽이 훨씬 낫다. 봉긋봉긋한 꽃망울은 그것으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도 하려니와 그 속에서는 앞으로 피어날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산을 시작할 때 멀리 보이는 정상부근에 구름이 머물러있더니 역시 1,400고지쯤에서는 가는 비, 우산을 펼쳐 들어도 좋고 말아도 그만일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폈다 접기를 몇 번 반복했다. 1,466미터 정상 표석(標石)이 있는 곳에서의 전망은 안개뿐이었다. 다행히 우리 주변 가까이 밀려오지는 않아 철쭉군락지의 수줍음을 한껏 머금고 총총한 연분홍 꽃봉오리들은 감상할 수 있었다. 비구름은 정상부근에서만 놀고 있었으므로 하산이 거듭될수록 길은 다시 보송보송해졌고, 길가에는 산괴불주머니가 노랗게 쫙 깔려 연한 미소로 우리를 맞고 있는 듯했다. 감로수 샘터에 이르러서는 ‘단이슬물[甘露水]’로 목을 시원하게 축이며 흙 묻은 바짓가랑이를 털 여유도 있었다.
천둥 번개 친다던 하늘은 허풍 번개에 그쳤고 맑게 개지 않았어도 비교적 괜찮은 여건에서 산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다. 활짝 핀 철쭉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봉오리로서 대신하였다. 모양 크기와 빛깔 등 뽐내려는 취향이 각각 다른 엉겅퀴 앵초 벌깨덩굴 산괴불주머니 등 야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들꽃들과의 조우는 이 산행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할 것이다. (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