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광활한 대평원
그토록 너른 땅, 며칠을 자동차로 달려도 끝을 볼 수 없는 평원을 지나고도 미국의 땅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가면 여행에서 경험한 것의 핵심을 빼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9백40여만 평방 킬로로서, 비슷한 수준의 캐나다보다는 조금 넓고 중국보다는 20만 평방 킬로쯤 작다. 남한만으로는 백 배 가까이 되며 남북한을 합한다 해도 50배 정도로서 평균 주 하나가 한반도 만하다. 우리나라 서너 개쯤 통과하는 동안 산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구릉 하나도 보지 못하니 그 평평함이 얼마나 넓고 너른 것인가. 밋밋해 보이는 나뭇잎 하나에도 나름대로 들고남이 있는데 이 넓은 땅덩이가 어찌 이렇게 골라놓은 운동장처럼 평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 정부의 정책이 달라서인지, 특성별로 갈라놓아서인지 최소한 우리가 지나온 주들은 풍기는 칼라가 각각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맞닥뜨린 일리노이주는 같은 평원이라도 숲이 많고, 그 속에 집들이 듬성듬성 들어있어 사람 사는 동네인 느낌이다. 숲 속에는 골프코스나 공원 같은 것이 펼쳐있을 것이며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누리며 사는 지역 같아 보인다.
일리노이 옆에 붙어있는 아이오와는 넓고 넓은 농지로서 전개되었다. 심어놓은 것들이 멀리 보여 자세히는 판별하지 못하지만,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닌 옥수수 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간이휴게소(rest area)에 들르면 풍요로움을 즉각 느끼게 하는 주가 아이오와였다. 관리인이 붙어 틈틈이 청소하여 늘 깨끗하게 유지하고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되어있는 각종 여행정보가 가득 쌓여 있었으며 그러고도 정보제공을 위하여 특별히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아이오와 다음으로 지형이 마치 포장마차의 포장 모양을 하고 있는 네브래스카주는 목축업이 주요 산업인 곳이었다. 풍성한 초지가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방목되어 노니는 소 떼에 비하여 단위당 면적이 워낙 넓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별문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네브래스카의 광활한 방목지를 보며 『늑대와 함께 춤을』이나 그 밖의 서부영화에서 수많은 들소가 무리 지어 이동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이곳은 분명 들소 떼들이 카우보이에 쫓겨 이리 닫고 저리 뛰던 곳이며 인디언과 기병대의 충돌이 잦던 땅일 테다. 더욱이 우리가 가고 있는 I-80 네브래스카 구간, 그랜드 아이얼런드(Grand Islands)에서부터 노스 플래트(North Platte)를 지나 오갈랄라(Ogallala)까지 플래트강(Platte River)을 낀 2백 마일은 대부분이 1847년 모르몬교도 선구자들이 손수레에 어린아이와 가재도구를 싣고 피땀 흘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박해가 없는 자유로운 땅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가던 역사가 서려 있는 길, 곧 「Mormon pioneer trail」이다.
‘빛 고운 콜로라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colourful Colorado)’ 우리나라처럼 행정구역이 바뀔 때마다 이런 종류의 환영표지가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주가 바뀌면서 주명(州名)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벌써 풍기는 분위기가 현저히 변한 것을 느끼게 된다. 아직 삭막하고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듯한 다복 덤불이 띄엄띄엄 나 있으나 구릉이 지기 시작하는 것이 영국의 황야(moor)와 같은 분위기를 콜로라도는 주고 있었다. 멀리 3, 4천 미터의 흰 눈 덮인 산이 보이지만 아직은 평원에 가깝다.
이런 너른 벌판에서는 가옥이란 어쩌다가 한두 채 있을까 말까 할 지경이다. 이와 같이 한없이 외딴 동네에 태어나 평생 몇몇 가족과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농기계나 가축이 벗의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사회와는 격리된 생활과 같을 것이며, 그것이 성장 과정에 어떤 영향을 주고 또 어떤 타입의 인간형으로 완성되어 갈 것인가. 이들에게도 잘 사는 나라 미국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있을 것인가. 결국 땅이나 파먹고 소나 기르는 미국 촌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너무나 띄엄띄엄 나타나는 집들을 보며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덴버까지의 장장 1천 마일, 평원 4천 리이다. 남북으로는 또 얼마 만한 대지가 이러한 평평한 땅으로 뻗쳐있을지는 쉽사리 상상이 안 되지만 무지막지하게 넓은 땅일 것이란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