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사회
투입과 산출은 비례하다.
라는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믿음이었는지, 사회에 한 걸음을 내딛고서야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곧잘 했던 나는 이 말을 신봉하며, 19년의 긴 학창 시절을 버텼다. 선생님말을 꼼꼼히 듣고, 착실히 준비한 시험의 결과는 항상은 아니지만, 대부분 좋았고, 죽도록 하기 싫어 얼렁뚱땅 시험 바로 직전 뇌에 찍어내던 시험의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다. 투입과 산출이 반비례하던 날들도 종종 있었지만, 큰 이변은 없었기에 나는 이 명제를 참으로 믿으며 20여 년을 넘게 살았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되려 그 믿음이 더 강해졌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배경과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다 보니, 학업에 열정을 쏟는 모수는 고등학생 시절 대비 확연히 줄어들어서, 내 믿음을 방해하는 변수들이 더욱더 사라졌다. 투자한 시간만큼의 성적을 받으며, 어리석게도 세상은 공평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나가려는 시도를 할 때부터 나의 믿음은 처참히 무너져갔다. 사회는 학교처럼 하나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았다. 학업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 해외 경험, 집안, 외모, 운 등 수백 가지의 기준이 있었고, 각각 회사마다 선호하는 기준은 다 달라서 어느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딘가에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는 있겠지라는 생각만으로 앞만 보고 달려도, 나에게 주어지는 건 '귀하의 역량~'으로 시작하는 문자와 메일뿐이었다. 그 과정을 수백 번 반복하고 나서, 드디어 나를 좋게 봐주는 회사가 나타나서, 원하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회사에 입사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투입과 산출은 비례하다'라는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투입과 산출이 비례하지 않는 사례만 일부러 모아놓은 것 같이, 회사는 조직의 사정과, 상사의 입맛, 직원들의 가치관 등 더 많은 변수로 굴러가고 있었고, 착실하게 일'만' 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가 인정받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를 눈앞에서 몇 차례 목격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담배 피우는 시간이 더 긴 사람이 상사에 눈에 들어, 그의 과제가 실의 우선순위로 선정되는 경우도 몇 차례 목격했다. 그러다 보니 '투입과 산출은 비례하다'가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의 투입과 성과는 비례하다'라는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는 성실함보다는 효율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고, 그 가중치를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온 내가 참 어리석어 보였다. 그때부터 왜 사람들이 '중간'만 하려 하는지 이해가 갔다. '중간'만 했을 때, 운 좋게 좋은 결과가 나오면, '효율성'은 더 좋아지니까.
내가 믿어온 가치가 틀렸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지만, 나는 아직은 '투입'과 '산출'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물리적인 시간의 투입'과 '성과'는 비례하다고 믿고 싶다. 더 많은 시간을 써서 좋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이야말로 그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잡을 수 있는 거니까. 20,30년 뒤, 중간을 외치고 있는 나의 일상에, 문득 오래전에 썼던 이 글이 생각났으면 한다.
-당신의 열정에 응원을 보태며, 두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