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왕국, 비화가야

시인의 문화기행

by 김백



4화 비밀의 왕국, 비화가야 上






■ 뜨거운 땅, 비사벌의 기억


비사벌은 본디 뜨거운 땅이었다. 신라 시기에는 비자화군(比自火郡), 삼국 시대에는 서화현(西火縣), 삼국통일 이후에는 화왕군(火王郡)이라 불렸다. 불뫼산으로도 전해지는 화왕산(火旺山)과 입김처럼 뜨거운 기운을 뿜는 부곡온천까지, 이 일대의 지명들은 하나같이 불의 기운을 품고 있다.

이 뜨거운 땅에서 천오백 년 전, 불꽃처럼 살다가 불꽃처럼 흩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비화가야 사람들이다.

봄이면 화왕산 철쭉꽃이 혼절하듯 피었다 지고,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점령군의 깃발처럼 능선을 흔드는 곳. 그 산정에는 낙동강과 밀양강을 병풍 삼아 둘러쳐진 퇴뫼식 화왕산성이 오늘도 굳게 자리하고있다.

화왕산을 바라보면, 강물처럼 흘러간 비화가야 사람들의 숨결이 되살아난다.

그들은 봄이면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며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면 은빛 억새밭에 아이들과 뒹굴며 일가를 이루웠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면, 부족의 안위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칼을 들고 산을 뛰어 내려갔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흔적이 바로 화왕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교동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 천오백 년의 시간을 품은 비화가야의 고대 유적들이다.


■ 가을빛 속으로 길을 나서다


베일에 가려진 제국의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길, 가을은 이미 진득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희미한 연기처럼 산자락을 감싸는 갈색 기운과 볕 한 조각 남기지 않은 흐린 하늘이 오늘 여정의 기운을 먼저 말해주고 있었다. 이번 답사에는 독자 두 분이 동행했다. 시를 쓰는 이들이라 그런지, 차 안에는 제국의 이야기가 우포늪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오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덕에 운전에서 벗어나, 마치 누군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처럼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볼 수 있었다.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자 산과 들은 이미 붉은 마른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녕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 흐린 공기가 차창을 스치며 차 안으로 밀려들었고, 차는 어느새 깊은 가을 속으로 천천히 잠수해 들어가고 있었다.

창녕박물관에 들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교동고분군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순간, 땅 냄새가 눅진하게 올라왔다. 한적한 도로 뒤편, 낮은 능선에 점점이 놓인 고분들은 오래된 별자리처럼 고요히 박혀 있었다. 봉분들은 세월에 닳아 둥글게 말려 있었고, 억새 사이로 스치는 바람은 마치 먼 시대의 속삭임처럼 귓가를 건드렸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 아이의 손을 잡은 사람, 서로의 그림자를 밟아가며 봉분 사이를 걷는 연인도 있었다. 고분군에 퍼져 있는 그 느린 걸음들은, 이 땅이 한때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품었던 자리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듯했다.

나는 셔터를 누르며 문득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그 바람 어딘가에는 비화가야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숨결이 아직도 배어 있는 듯했다.



밤이면
무덤들은
관모冠帽의 구슬처럼 반짝거린다


무량한 세월
해와 별이 떴다 지고
바람은 부재의 영혼을 흔들며
전장의 발굽처럼 서성거린다


어느 군주의 성역인가
봉분은 하늘에 닿을 듯
초록의 등을 딛고
불사조의
권세처럼 솟아 있다.


- 졸시 「고분 古墳」



■ 유적마다 드리워진 일제의 그림자


창녕박물관은 현풍으로 향하는 국도 20호선을 사이에 두고 교동고분군과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관람객보다 직원이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남녀 두 해설사는 더욱 친절하게 우리 일행을 반겼고, 박물관 전시실을 돌며 오래도록 정성스레 설명해 주었다. 해설사의 해박한 해설은 숨겨진 역사를 차례로 끌어올리며 우리를 깊이 감동시켰다.

창녕 지역에는 교동고분군을 비롯해 송현동 고분군, 계성고분군 등 5~6세기 가야 시대의 고분 250여 기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침탈적 발굴 조사가 강행된 지역이다. 당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금동관, 금동제 관모, 금·은 장식 환두대도 등 왕과 지배층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물들은 물론, 각종 토기까지—그들이 가져간 유물이 무려 기관차 두 량 분량이었다는 말에 우리는 말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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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골 -창녕박물관



유적지를 답사할 때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진품 대신 유리관 속에 놓인 모조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겉만 번듯하게 정비해 놓은 빈껍데기 무덤들이 그 상실의 크기를 더 크게 느끼게 한다. 일제의 만행은 유적마다 지워지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교동고분군은 창녕박물관 앞 목마산 구릉지 일대를 넓게 채우고 있었다. 이 유적은 1911년 일본인 세키노(關野貞)의 소개로 세상에 처음 알려진 뒤, 해방 직전까지 약 90여 기가 조사되며 점차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조사 기록은 21호와 31호 두 기 외에는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적조사’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무덤을 파헤쳤을 뿐, 출토품은 대부분 수탈해 갔다.

그 이후 이 일대에는 도굴이 성행했고, 무덤들은 황폐해졌다. 무덤이 있던 자리는 차츰 주민들의 경작지로 변해 갔고, 고분군의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광복 후,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우리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1천5백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단 한 번도 닿지 않은 채 보존되어 온 ‘처녀분(63호분)’이 모습을 드러내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서 여러 종류의 토기와 화살촉 등 피장자의 높은 신분을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무덤 한편에서는 순장의 흔적을 가진 또 다른 공간도 발견되었다.

교동고분군은 인접한 송현동 고분군과 더불어 5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동을 중심으로 비화가야의 수장급 인물과 그 가족, 혹은 친연 관계에 있는 이들의 크고 작은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창녕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은 양산 부부총, 동래 복천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 등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만 비화가야는 가야 제국 중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양상을 보이고 있어, 가야가 멸망 직전 신라화되어 가는 과정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 목마산성 기슭의 송현리 일대 2개 지역에 분포된 40여기의 가야시대 고총고분군을 말한다. 1군은 동북쪽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뻗어 송현동 일대에 걸쳐 있으며 그 일부는 도야리로 통하는 도로를 넘어 교동지역까지 넓게 분포돼 있다. 원래는 80기 정도였으나 지금은 16기에 불과하다.

2군은 송현동 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기가 있었으나 대부분 농경지로 개간되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곳의 고분들도 대부분 일제 강점기 약탈적인 발굴과 도굴로 인해 멸실 훼손 됐었다. 그럼에도 녹나무 목관과 순장 인골의 출토는 창녕고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실내전시관을 돌고나서 해설사가 차로 고분 현장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시간문제도 있었지만 7년 전에도 한번 들렀던 곳이기도 했다. 당시 발굴현장을 답사했을 때 마침 7~8명의 사람들이 작업중이었다. 천막으로 하늘을 가려놓고 삽질을 하고 붓으로 흙을 쓸어내고 있었다. 실측을 하고 도면을 뜨고, 신비의 역사퍼즐을 맞추려는 학자들의 눈빛이 구슬땀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발굴현장은 늘 그렇다. 무덤의 부드러운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은 경이롭고 설렘의 연속이다. 무엇이 나왔는지 물어보는 것은 공식적으로 설명회를 하기전까지는 불문율이다.


■ 천오백 년의 어둠을 뚫고 온 소녀, 송현이

15호분에서 남녀 두 쌍 4구의 인골이 출토됐다. 그 중 하나가 복원된 '송현이'의 인골이다. 무덤 속은 이미 도굴꾼들이 몇 차례나 다녀간 뒤였다. 죽어서도 살기를 원했던 주인의 인골은 도굴꾼들의 발길에 부스러져 사라지고 주인을 따라 죽은 비운의 소녀는 어둠속에서도 반금동귀고리를 반짝거리며 완전체의 상태로 발견됐다. 그리고 고고, 법의, 인류, 생물, 해부학 등 각계의 전문가들이 소녀의 부활을 위해 1년 동안 복원작업을 했었다.

송현이는 턱뼈가 짧고 목이 긴 가녀린 허리의 미인이었다. 아이를 가진 적이 없으며 무릎을 꿇은 생활을 지속적으로 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사랑니도 자라지 않은 어린 소녀가 약물에 의해 중독사 했음이 복원과정에서 나타났다. 나이 16살, 키 152센티, 허리 21.5인치라는 점도 밝혀졌다.

송현동 고분에서 나왔다 해서 '송현이'라 이름 지어 준 가야의 소녀, '송현이'가 1천5백년 만에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 다음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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