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그녀.
투명한 피부에 깊은 눈은 언제나 반달 모양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무엇을 입어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린 몸의 어디에서 에너지가 나오는지 늘 생기가 넘친다. 무엇이든 못하는 것 없이 능숙하고 여유롭게 해낸다. 내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진심을 다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찬사를 보낸다. 주위의 모두를 배경으로 만드는 눈부신 그녀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TV와 책 속 빛나는 그녀들의 모습.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이상향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녀가 되기로 서서히 결심해갔다. 어리고 무르던 마음의 반죽은 빛나는 그녀라는 틀을 만들고 조금씩 굳어졌다.
그녀와 가까운 행동을 할수록 얻게 되는 칭찬과 호감, 그녀와 거리가 먼 행동을 할 때 마다 들리는 꾸중, "어휴, 남들이 뭐라고 하겠니."라는 걱정어린 탄식은 나를 점점 '남들 맞춤형 인간'이자 '빛나는 그녀'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했다.
빛나는 그녀는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고등학생 시절, 기말고사 시험기간. 책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세로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가 슬며시 다가왔다. 한자 과목 시험 공부를 하나도 못했다고, 제발 한 번만 시험칠 때 슬쩍 보여주면 안되냐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애원하듯 말하는 친구에게 3초 고민 후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시험지에 진하게 답 적고 니 책상 쪽으로 놔둘테니까 요령껏 보고 해."
세상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그녀. 환장할 노릇이다.
빛나는 그녀는 얼굴 구기는 법이 없다.
스물네살 어린 티가 풀풀 나는 신규교사였던 나는 첫 회식 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교장 선생님의 옆자리로 불려갔다.
"어이 거기 이지미 선생님~ 왜 거기 앉아있어. 샘 자리는 여기야, 여기!"
술이 거하게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선배들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 교장선생님의 옆자리에 앉았다.
술을 한 잔 따라보란다. 호호호. 스물네살에게 어울리는 웃음을 짓고 소주잔 찰랑이게 술을 가득 따르고 짠. 한 잔 받아보라길래 또다시 호호호. 한 잔 받고, 두 잔 받고, 세 잔 받고.
마음은 이미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저 먼저 갑니다!"를 외쳤지만 얼굴은 스마일 가면이라도 쓴 듯 꿈쩍도 않는다.
세상에. 얼굴 구기는 법이 없는 그녀. 환장할 노릇이다.
빛나는 그녀는 맡은 역할을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학생이라면 마땅히 학업에 충실해야한다길래 영혼을 갈아 공부했고, 신규교사라면 마땅히 '네! 제가 하겠습니다!'해야한다길래 궂은 일도 나서서 했다.
선생님이라면 마땅히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길래 10년간 만난 모든 아이들에게 매주 일기장에 긴 코멘트를 달아주고 있다. 엄마라면 마땅히 어린 자녀를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대해야 한다길래 마음에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수많은 마땅히들이 등을 떠밀었다.
세상에. 맡은 역할을 단 한순간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는 그녀. 환장할 노릇이다.
빛나는 그녀는 화를 폭발시키는 법이 없다.
남편의 잘못에 화났던 날, 나의 부부싸움 이야기를 전해듣던언니가 말했다.
"아니 너는 화를 그렇게 우아하게 내니? 그러면 니 화가 풀려? 그렇게 감정을 억눌러서 어떻게 사니? 니가 그러니까 화병에 걸리는거야."
마음에 병이 들어 끙끙 앓던 즈음 신청하게 되었던 상담.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지미님은 혐오한다는 격한 표현 조차 우아하게 말하고 있어요."
세상에. 화를 폭발시키는 법이 없는 그녀. 환장할 노릇이다.
빛나는 그녀의 삶에 그녀는 없다.
남의 부탁, 남의 감정, 수많은 당위만 존재할 뿐. 환장하는 인생이다. 그녀의 삶은 다시 쓰여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하는 부탁, 자신의 감정, 당위를 내려놓은 뒤 솟아오르는 수많은 욕구들로 채워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보고싶다.
환장하는 그녀의 빛나는 인생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