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하준이를 데리고 예스24 매장에 갔었거든. 매장에서는 책 말고도 이것저것 다양한 물건을 파는데, 알팔파 키우기 세트를 팔더라구. 알팔파는 새싹 채소래. 새싹 비빔밥 해먹을 때 넣는 그 채소 말이야. 하준이가 키우고 싶다고 해서 하나 사왔어. 물이 담긴 작은 컵 위에 받침대를 놓고 솜을 깐 다음 알팔파 씨앗을 흩뿌려두면 싹을 틔운다고 했어.
어렸을 적 문방구에서 산 씨앗을 화분에 심었을 때 단 한번도 새싹이 나온 경험이 없었거든. 알팔파 씨앗에게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어.
그런데 며칠 뒤 하준이가 호들갑을 떨며 엄마를 찾는 거야. 알팔파 싹이 아주 조그맣게 나왔다고, 너무너무 신이 난다고 말이야. 가서 봤더니 깨보다 작은 씨앗에서 아주 작은 줄기 하나가 빼꼼 나와있더라구. 자고 일어났더니 더 많은 씨앗에서 줄기가 나와 있었어.
하준이는 신이 났어. 하루에도 몇 번씩 가만히 알팔파 씨앗을 들여다 보곤 했지. 유치원에 다녀온 어느 저녁에 제법 초록 줄기가 길어진 알팔파를 보며 하준이가 말했어.
“엄마, 이 작은 씨앗 안에 다 들어있어요. 알팔파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요.”
세상에. 나는 그 말이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그 순간을 꼭 붙잡으며 하준이에게 말했어. 넌 너무 멋진 아이라고, 작은 씨앗 안에 숨어있는 커다란 것을 볼 수 있는 아이라고 말이야.
호프 자런의 <랩걸>이라는 책이 떠올랐어. 식물을 사랑한 여성 과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야. 읽고 난 후 마음에 따뜻한 사랑이 차올랐던 기억이 나. 나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가족에 대한 감사함, 힘든 순간마다 손을 잡아주는 친구들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전에 없던 식물에 대한 사랑까지. 작가가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책 밖에 있는 나에게도 천천히 스며들어서 덩달아 식물에게 마음을 쓰게 되는 책이었어.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풀과 들꽃 하나하나 모두 귀하고 멋지게 여겨지는 신비가 일어나더라.
하준이의 말을 듣고 그 책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어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랩걸> 호프 자런
싱그러운 초록잎이 무성한 나무도 처음에는 씨앗이었다는 것을, 작은 씨앗 안에는 나무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면 우거진 나무가 된다는 것을. 하준이는 작은 알팔파 씨앗이 움트는 것을 보면서 알게 되었던 거야.
하준이가 건넨 말은 울퉁불퉁하던 내 마음을 부드럽게 둥글려주었어. 사실 나는 요즘 씨앗의 힘을 믿지 못해서 불안한 엄마였거든.
취향에 안 맞으면 심드렁하고, 도전적인 일을 만나면 뒤로 내빼는 하준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차올랐어. 학교 가서 잘할 수는 있을까, 친구들보다 뒤처지지는 않을까, 왜 이것도 못할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
‘힘들거나 말거나, 좋아하거나 말거나 그냥 참고 해. 하다 보면 다 잘하게 돼 있어.’
스스로에게 되뇌이던 말이 목구멍 끝에 그렁그렁 맺혀 하준이에게 나오기 직전이었어. 그 말이 얼마나 고유성을 지워버리는 잔혹한 말인지 알면서 말이야. 간신히 삼키긴 했지만 마음 속 갖가지 걱정은 잠재워지지 않더라.
책상에 앉아 잠깐 숙제를 하면서도 몸을 뒤틀고, 열 번을 가르쳐 줘도 열 번 다 고스란히 잊어버린 채 장난치는 것만 좋아하는 하준이를 보면서 불뚝불뚝 화가 치솟았어. 몇 번 혼을 냈지.
혼이 나서 풀이 죽은 하준이가 말했어.
“엄마 이제 나 안 좋아해요?”
듣자마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 엄마는 하준이를 여전히 많이 사랑한다고, 하준이가 좋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엄마 역할이기 때문에 혼을 낼 때도 있는 거라고 알려줬어.
그런데 그날 밤 곱씹어 생각해보니 하준이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거야. 하준이를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에 자꾸 바람이 섞여. ‘야무지게 할 일을 잘하기를, 단체 생활에서 뒤처지기 않기를, 가르쳐준 것은 제발 기억하기를.’
자기 속도대로 걸어가면 언젠가 잘 할 수 있을거라고 기다려주던 내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어. 사랑만 가득하던 주머니에 갖가지 바람이 섞여 들어오니 사랑의 자리가 조금 줄어들 수 밖에.
불신하고 조급해하는 엄마가 되어가기 시작할 때 하준이가 내게 알려줬어. 씨앗 안에는 식물로 자라기 위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그저 물이 되고 햇살이 되어 씨앗이 잘 싹 틔울 수 있게 기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 하준이를 보고 있으면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작은 씨앗이 떠올라. 언젠가는 튼튼한 줄기를 뻗어내고 뿌리를 넓혀가며 꽃을 피울거야. 하준이에게 이야기했어. 하준이가 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네 안에 들어있다고, 어떤 꽃을 피워내든 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겠다고 말이야.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몸을 베베 꼬며 숙제 하기 싫어하는 하준이. ‘하기 싫어도 해야할 일은 하고 놀아야 돼.’라고 혼나긴 하겠지만 아마 이제 더 이상 그때 같은 의문을 품지는 않을거야. “엄마, 이제 나 좋아하지 않아요?” 같은 의문 말이야.
하준이를 향해 갖는 바람들을 날려버렸으니까. 내 마음의 주머니를 다시 사랑으로만 가득 채워 넣었어. ‘씨앗! 너 싹 틔울 마음이 있긴 한 거니?’ 같은 조급함은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흠뻑 사랑해 줄 거야. 흙내음 가득한 토양처럼, 따뜻한 햇살처럼, 시원한 빗줄기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말이야.
혹시나 갖은 바람들이 고개를 내밀게 되는 순간, 그래서 위태롭고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순간, 다시 떠올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