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은 점심 먹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왔어. 집순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빠지지 않고 가고 있어. 도서관에 들러 읽을 책을 양손 가득 빌려오면 마트에서 싱싱한 식재료를 사올 때 보다 더 든든한 기분이야.
얼마 전에 온라인 독서 모임을 했었거든. 그때 질문 중 하나가 ‘내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나요?’라는 거였어. 그때 내가 대답한 곳이 도서관이야.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요란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깐 벗어난 고요가 느껴져. 차곡차곡 정리된 책 냄새를 맡으며 서가 사이를 걷고 있으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더라. 당장 해결해야 할 것만 같던 사소한 걱정거리들이 작게 접은 종이 딱지처럼 줄어들어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려. 책들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이런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갈 만하지?
내가 이렇게 책을 동경하고 사랑하게 된 건 엄마 영향이야. 엄마가 어렸을 때 어린 나를 앉혀두고 이렇게 말했잖아.
“지미야, 엄마는 윤동주 시인을 정말 좋아해. 엄마가 학생 땐 윤동주 시를 거의 다 외우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지. 다음에 사진 찾아서 보여줄게. 미남이야.”
푸하하. 미남이라는 걸 얼마나 강조하던지, 엄마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예쁜 우리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윤동주는 누구일까? ‘시’는 뭐지? 어떤 거길래 엄마가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말할까? 어린 나는 엄마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따라하고 싶었고, 엄마가 좋아하는 건 따라 좋아하고 싶었어. 나도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기로 한 거지.
그때 난 열살도 안 된 꼬마였으니 시를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 속에는 시를 향한, 활자를 향한 동경을 품게 되었어. 엄마가 나에게 무심결에 뿌린 취향의 씨앗이 지금은 이렇게 푸른 숲이 되었네. 활자를 동경하던 꼬마가 지금은 책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얼마 전에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을 다시 읽었어. 나에겐 고전에 대한 벽을 허물어뜨려준 연애소설 같은 책이야. 책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해. 여주인공 폴, 폴의 오래된 남자친구 로제, 폴에게 나타난 새로운 남자 시몽. 등장인물만 봐도 흥미진진한 삼각관계가 예상되지?
폴의 남자친구인 로제는 폴을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는 남자라 폴은 자주 고독하고 공허해. 그런 폴에게 잘생기고 능력있는 연하남 시몽이 나타나. 시몽은 자기 삶에서 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폴의 감정을 배려해주는 섬세한 남자지.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긴 할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 구절을 보고 한참이나 생각했어.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가 그때의 나에겐 조금도 없었거든. 그냥 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살고 있었어. 당연히 잘해낼 줄 알았던 육아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산처럼 거대하게만 느껴졌던 때야. 박서방이랑은 같은 집에 살고만 있었지 마음의 교류 같은 건 조금도 없었고. 눈을 감으면 깨지 않기를 바라며 살던 날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책이 나에게 묻는거야.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하고 있냐고, 어떤 시선으로 자기 생활 너머를 대하고 있냐고. 말문이 탁 막혔어.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찾아봤어. 무너질 것 같은 하루에서 잠깐 벗어나 무엇인가를 좋아할 여유를 가져보자면서.
SNS를 보면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진이 주루룩 이어져. 미술관 관람, 골프, 예쁜 카페 투어, 필라테스. 하나같이 반짝이고 행복해보여. ‘나도 저곳에 가면 행복해질까?’ 희망을 품고 이것저것 따라해봤어.
좋아하는 마음은 행복해 보이는 것을 따라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더라. 시간도 넉넉지 않은데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흉내 내는 것이 한심했어. 그건 내가 아니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거짓으로 꾸며낼 여유가 없었으니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그 구절을 만났어.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가 있냐는 질문에 편안히 미소 지었지. 자기 생활 너머에 있는 것을 사랑할 여유. 나는 책을 사랑하고 있었어.
내 생활에 착 붙어서 하루를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어주는 책들, 이를테면 육아서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에게는 마음이 잘 안 갔어. 내가 디디고 있는 이곳과는 정반대의 세계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빠져들었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고 웬만한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다며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니기도 했고, <아몬드>나 <유원> 같은 성장소설을 읽으며 자라온 지난 시간을 반추하기도 했어. 철학책들을 읽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 없는 질문을 품기도 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고, 살림하기도 빠듯한 하루인데 그냥 그렇게 게으르게 책만 읽어댔어. 그 책들을 읽는다고 하준이를 더 잘 키우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생산성과 효율성 제로에 수렴하는 독서였지. 그 시간에 집안일을 했다면 우리 집은 모델하우스처럼 깨끗했을텐데, 그 시간에 투자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지갑이 두둑할텐데.
쓸모없어 보이던 그 독서가 나를 해방 시켜 주었어.
내가 읽은 책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등장해. TV나 SNS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수능 9등급 그 이후의 삶, 가난한 동네의 이야기,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의 이야기. 세상이 말하는 평균에서 조금은 빗겨난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야기 속 사람들은 모두 기쁨, 환희, 좌절, 분노들을 느끼며 얼룩덜룩한 삶을 끌어안고 살아가. 내가 사는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가 않았지. 수능 9등급, 가난, 결핍 같은 불행이 그들의 삶에 거머리처럼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짓는 시선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평균에서 벗어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무섭게 협박하는 세상가 삶의 진실과 얼마나 다른지. 책을 읽으며 배워갔어. 평균에서 벗어나도 하루는 계속되고, 그 하루 속에는 똑같은 기쁨과 슬픔이 흘러가더라. 별다를 게 없었어.
평균에서 벗어난 이상한 모습이 시간이 지나면 특출난 능력이 되기도 하고, 보통의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 지독한 가부장제 속에서 독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일하는 엄마’의 삶이 이제 평범한 삶이 된 것처럼 말이야.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반짝이게 만드는 것은 평균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쩌렁쩌렁한 세상의 협박을 모른 채하고 자기다움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들은 그렇게 안 해.’라는 소리에 주눅 들지 않고 자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남의 인생은 어떤지 기웃거리는 것보다 자기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런 노력들 말이야.
난 36년간 세상이 정한 평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잖아. 삐죽 튀어나오지 않으려 쏟던 에너지를 이제는 나다운 하루를 보내는 것에 쏟을 거야.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이게 좋아.’, ‘나는 이걸 하고 싶어.’ 말하면서.
잘생긴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던 우리 엄마!
엄마도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사랑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출근하고 일하고 살림하고 잠드는 보통의 하루 안에 엄마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줄 무언가를 말이야.
엄마가 윤동주 시인을 말할 때 반짝이던 눈을 기억해. 지금은 손주랑 이야기할 때만 볼 수 있는 그 눈이 더 자주 빛나기를, 엄마다운 취향의 세계가 엄마의 하루를 밝혀 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