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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미 Sep 02. 2022

일곱살, 어린 완벽주의자가 사는 법

 숲이 좋고 나무가 좋은 일곱 살 아이. 숲에서 뛰어놀며 세상의 모든 미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좋은 아이에게 고난이 찾아왔다. 유치원의 한글 수업이다. 매일 아침 울먹이며 물었다.


 “오늘 한글 수업해요?”

 “한글 수업이 얼마나 힘들지 알아요? 이만큼 많이 글자를 적어야 된다고요.”     


뛰어노는 것이 마냥 좋은 시기에 가만히 앉아서 글자를 쓰는 것이 힘들겠거니 생각하며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그 주 금요일 저녁, 일주일간의 유치원 생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받았다. 한글 수업이 아이에게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가 사진 속에 있었다.



 완벽한 모양의 글씨를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꾹 눌러 써서 새까만 글씨, 책에 코를 박을 듯 가까이 다가간 얼굴, 연필을 꽉 쥔 손. 그 모습으로 글자를 한 줄만 써도 ‘아, 손 아파.’, ‘에고 힘들어.’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이제 겨우 더듬더듬 한글을 읽는 아이가 긴 문장의 글자들을 예쁘게, 아니 스스로 완벽하다고 느낄 정도로 잘 쓰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 완벽주의. 아이는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있었다.     


완벽주의란 보다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이며,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의 태도다. (...) 완벽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한다는 점에서 예정된 실패자다. 불행의 씨앗을 품고 살기 때문에 항상 초조하고, 때때로 우울하다.

<어린 완벽주의자들> 장형주



완벽주의자는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완벽주의자는 끊임없이 완벽한 상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허술하고 허당이더라도 누구나 완벽주의자일 수 있다.  

    

 지금의 모습에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 완벽주의자는 늘 이상을 향해 달린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꿈꾸며. 그래서 자주 불안하고 불행하다. 애쓴 자신을 안아줄 줄 모르고, 나아진 스스로를 격려할 줄 모른다.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 많은 성취를 손에 쥘 때도 있지만, 성취를 누릴 줄 모르고 또다시 한 단계 나은 상태를 꿈꾼다는 점에서 완벽주의자는 늘 불만족에 시달린다.     




 나는 아주 오랜 기간 완벽주의자로 살았다. 결코 완벽하지 않은 허술한 완벽주의자.


그래서 현재의 자신에게는 늘 불친절했다. 더 잘난 내가 되기를 갈망했고, 더 행복한 내가 되기를 소원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다가 좌절했고, 영화에나 나오는 완벽한 교사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무릎 꿇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다가 예견된 실패의 쓴맛을 보곤 했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해?’

‘왜 나만 이렇게 별로야?'


불행의 씨앗을 품은 질문을 안고 불안한 현실을 뒹굴다 부딪혀 터져버렸다. 그곳에서 함께 터져 나오는 진실의 조각들. 책 속에서,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발견한 진실의 조각은 ‘꿈꾸는 완벽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두 다리를 딛고 있는 거대한 완벽주의라는 땅에 매일 부지런히 괭이질을 한다. 흙을 고르고 땅을 판다. 세상살이에 완벽은 없고 정답도 없다고. 잘 닦아 놓은 아스팔트 길처럼 굳건하던 완벽주의의 영토는 금이 가고 있다.      



 몸에 덕지덕지 붙은 완벽주의를 하나씩 떼어내며 아이에게 불완전을 장려한다.


 “꼭 완벽한 모양으로 글자를 적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컴퓨터 글씨처럼 잘 쓰고 싶단 말이에요.”

 “예쁜 글씨 쓰기 대회에 나간 것도 아닌걸. 준이는 지금 글자를 배우고 있는 단계야. 글자 모양을 기억하면서 쓰는 게 중요하지.”

 “....”

 “손에 힘을 좀 빼볼까?”     



 완벽한 글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여 한 줄을 쓰고는 더 이상 힘이 없어 남은 것들은 포기하는 아이. 전형적인 완벽주의자의 모습이다. 완벽을 위해 에너지를 초반에 몰아 쓰고 쉽게 지쳐버리는 모습. 결국 수행을 중단하는 모습.    


  

 그래서 아이는 힘 조절을 배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삐뚤어진 글씨로 끝까지 해내는 것. 지우고 다시 쓰면 완벽해질 것 같아도, 눈앞에 더 예쁜 글씨가 아른거려도, 정성껏 쓴 자신의 글씨를 수용하는 것, 그래서 불완전한 상태로 끝까지 가보는 것.      



완벽주의자인 아이와 엄마가 함께 배워가는 삶의 자세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아쉬움'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도, 잊을 수 있는 용기를 내야한다. 삶의 단점에 집중하기 보다는 장점에 만족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런 태도로 자녀를 대함으로써 자녀 또한 자신의 삶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돈도 명예도 아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다.

<어린 완벽주의자> 장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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