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완벽했어. 좋은 직업, 높은 연봉, 고급 아파트, 취미는 골프와 필라테스, 영어 유치원 졸업 후 사립초에 다니며 언니처럼 똑 부러지게 공부하는 딸, 전문직 남편, 몸에 밴 다정함.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니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에 씁쓸함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어.
(중략)
출간 예정입니다.
네,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절대로 정말로 더 낫지 않죠! 그놈도 짐승이에요.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오직 그놈만을 잘 알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하죠.
<그리스인 조르바> 카잔 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감탄이 흘러나와. 조르바가 말하지.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한다고 말이야.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내 눈과 귀와 위장으로 나에게 집중하며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조르바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어. 내게 ‘살아있다.’라는 동사를 온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조르바야.
내가 겨우 벗어 나온 다수의 굴레에서 여전히 성실히 걸어가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조르바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 그렇게 조금씩 그곳에서 밖으로 걸어 나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조금은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다수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쏟는 에너지를 나에게 쏟으면 되니까 말이야.
‘나를 양도해 드립니다.’
‘내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결정해주세요.’
‘내가 무엇을 살지 골라주세요.’
다수의 결정을 신뢰하는 마음, 고분고분하게 기다리는 마음에 자리 잡은 연약한 생각들. 이런 생각들을 싹둑싹둑 가위로 잘라버리고, 내 삶만큼은 절대 양도할 수 없다고 두 주먹에 ‘살아있음’을 꼭 움켜쥔 지금. 나는 아주 가벼워. 그 무엇도 될 필요 없이 그저 ‘내’가 되면 되니까 말이야.
엄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났더니 조금 더 내가 된 기분이야. 엄마에게 조잘조잘 편지 쓰는 것만으로도 내가 되어갈 수 있으니 더 자주 편지할게. 오늘도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