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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경 Dec 17. 2024

레진아트 작업일지#3

매일 몇 작품을 만들어야 괜찮은 작가일까


탄핵 집회에 참가하느라 2주를 소모했다.

집회에 참석한 건 4번 정도인데, 집에 있는 시간에도 새로운 뉴스에서 관심을 뗄 수가 없었다.

지난 토요일 무사히 탄핵이 가결된 후, 나는 일상으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또다시 내 머릿 수가 필요하면 그때 다시 나가면 된다.

이제는 생활의 지속을 위해, 그리고 창작의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어제 아침부터 루틴을 돌려놓기 위해 나름 비장한 각오를 하고 움직였다.

선예약받아놓은 바인더 중 크리스마스 바인더가 2개나 있다. 당장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인데.. 이걸 더 늦게 보내드릴 순 없다.

작업에 활기를 띄기 위해 일단 밖에서 8 천보쯤 걷고 들어왔다.


운동량이 극도로 부족해 얼마 전부터 체중 조절을 위해 걷기 시작했는데, 걷는 날의 작업 퀄리티는 그렇지 않은 날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땀이 날 정도로 걷고 온 날은 작업에서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집착으로 마무리 과정을 망치지도 않았다.

암튼, 바인더를 만들기 시작한 날부터 이렇게 2주 동안 작업을 멈춘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걷기로 워밍업을 하게 된 것.

저녁 6시경부터 시작해 앤 바인더와 크리스마스 바인더 2개를 만들었다.



이번 앤은 수국이 테마였다. 독서하는 앤 시리즈는 언제나 인기가 많아서 다양한 시리즈로 만들어 보고 있다. (한국 여성들의 빨간 머리 앤 사랑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위의 “수국 온실의 앤”을 디자인한 건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이었다.

코팅하지 않은 채로 책상 위에 2주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뒤판 디자인을 한 후, 아래의 크리스마스 바인더 2개를 더 디자인했다.



이 바인더들은, 오늘 아침 예약했던 고객들에게 인스타 디엠으로 사진이 보내졌다. 구매 의사가 있음을 확인받았고 내일 사은품과 함께 발송될 것이다.

오늘 아침엔 6시에 기상해서 표지 사진의 초록색 크리스마스 바인더 2개를 제작했다.

시즌 판매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걷기로 했다. 5 천보쯤 걸어 몇 블록 떨어진 곳의 카페에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다.

걷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하루 최대 제작 양이 바인더 4개~6개 정도인데, 비상계엄부터 탄핵까지 2주 동안 (자발적이긴 했지만) 제작이 올스탑되면서 새로운 고민을 해 보게 되었다.

제작 양의 맥시멈을 최대한 늘려, 어떤 비상상황에서도 판매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재고를 보장할 순 없을까?

이 이상의 결과물을 원하는 것은 과연 욕심일까? 양을 늘리는 것보다 퀄리티에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걸까?


그러던 중, 1년 전쯤 읽었던 책 <그릿(Grit)>에서 읽었던 어떤 도예가의 이야기가 떠올라, 바로 아이패드를 열고 전자책을 펼쳐 찾아보았다.


미국 미네소타에 사는 워런 매켄지(Warren Mackenzie)라는 유명 도예가는, 젊은 시절엔 도예나 그림 텍스타일 디자인 그리고 보석 세공 등 이것저것 다 시도하며 만능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엔 도예 쪽으로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영역에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여러 영역에서 아마추어로 머무르는 것보다 만족스럽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경지에 오른 도예가는 40~50개의 작품을 만들며, 그 40~50개의 완성도와 가치는 제각각이지만 만든 작품들 중 소수는 늘 업계와 고객에게 찬사를 받게 된다. (아마 그에 따라 작품의 가격 또한 상승할 거라 믿는다.)


그는 90세를 넘긴 지금도 매일 물레를 돌리며, 이런 노력을 통해 기술을 향상해 왔다. 지금까지 1만 개 정도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래는 Grit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처음 1만 개의 작품을 만들 때까지는 힘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조금씩 수월해졌어요.”


작업이 수월해지고 매켄지의 기술이 향상되면서 하루에 만들어내는 작품의 수가 늘어났다.


-> 재능 x 노력 = 기술


동시에 그가 세상에 내놓은 훌륭한 작품의 수도 증가했다.


-> 기술 x 노력 = 성취


매켄지는 노력을 통해 ‘최대한 흥미롭고 사람들의 집에 어울릴 만한 작품’을 점점 더 잘 만들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부은 노력 덕분에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제작 과정이 다르고, 대량으로 디자인하고 구워 내는 게 가능한 도예는 내 레진아트 작업과는 분명 다르지만, 작업의 반복(노력) -> 공정의 안정 -> 기술의 향상 -> 결과물의 수적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은 비단 도예나 나의 레진 아트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모두 적용되는 것 같다. 심지어 글쓰기에도 말이다. (사실 Grit에서는 도예가의 예에 이어 ‘존 어빙‘이라는 작가의 예도 나온다.)


이렇게 카페에서 10분여간 <Grit>을 다시 읽은 후, 하루 제작량을 늘리는 방법에 대한 나의 고민은 바로 끝이 났다. 결론은 아래와 같다.


“고민을 할 시간이 있다면 과정 하나하나를 다시 짚어 가며 섬세하게, 작품 하나라도 더 만들어 보자. “

”비록 하나를 다 만들지 못하더라도, 쉬어가는 날 없이 한 과정이라도 손을 대자. 나는 아직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


생각해 보면 내 공예 작업은 더디지만 발전해 가고 있다. 디자인, 장비, 재료 수급, 포장 등에서도 점점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며 향상해 가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은 내가 무려 2주나 작업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일이 벌어졌어도 현존했어야 한다.

나는 작업 과정과 결과에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데, 2주 간 그런 즐거움을 내팽개치고 수시로 뉴스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내면에 불안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불안과 긴장이 작업량에 대한 고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물론 내 신념에 대해 행동을 취하는 건 스스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 현존하는 즐거움을 포기한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걸로 오늘의 고민은 해결됐다.

오늘 저녁에는 시즌 판매에 미련을 버리고, 그동안 만들고 싶었던 바인더들을 마음껏 디자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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