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신호, 놓친 타이밍

by 꿈담은나현


사거리로 향하던 길에서 초록불이 몇 번 깜박이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빛은 엷은 막처럼 도로 위에서 흔들렸고, 나는 그 앞에서 발끝을 살짝 내리며 멈춰 섰다. 지나가는 차 소리는 멀리서 울리는 파도처럼 낮게 번졌고, 바람은 은행잎을 굴리며 낡은 마찰음을 냈다. 바람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매캐한 가을 냄새가 뺨을 스쳤고, 하루의 끝이라는 사실이 더 느리게 실감 났다. 초록불이 꺼지고 붉은빛이 들어오자, 공기가 투명하게 갈라졌고, 마음은 오래 묻어둔 기억을 조용히 퍼 올렸다.


새벽의 방, 램프 아래 대본을 펼쳐놓고 혼잣말을 연습하던 순간이 느닷없이 되살아났다. 대사의 그림자는 종이 위에서 흔들렸고, 입술은 작게 긴장하며 문장을 따라갔다. 문틈으로 스며든 엄마의 “자니?”라는 목소리 앞에서 나는 서둘러 스톱워치를 껐고, 마치 무대 위 조명이 꺼지듯 방 안이 단숨에 고요해졌다. 뿌리를 찾지 못한 감정은 허공에서 천천히 가라앉았고,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방의 공기 속에 희미하게 떠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연극영화과 지원서를 여러 번 열었다 닫으며 자신을 설득하는 척했지만 결국 마음 깊은 곳을 천천히 걸어 잠갔다.


회사에서의 날들은 정확한 기계음처럼 반복되었다. 회의 알림은 늘 같은 음색으로 울렸고, 점심마다 향하는 카페의 커피 향은 향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모니터의 빈칸은 마음속 공백과 닮아 있었고, 동료의 “요즘 표정이 늘 같아.”라는 농담은 오래전에 들은 대사처럼 어딘가 어색하게 남았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은빛 흔들림 속에서 점점 색을 잃은 채 머물렀고, 그 사이로 잊힌 꿈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흔들림 하나만 있어도 내면 어딘가에서 오래된 감정이 조용히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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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담은나현, 따뜻한 이야기를 담는 사람/ 소소한 순간을 기록하며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합니다. 글이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온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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