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 사진 한 장

by 꿈담은나현


나는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내가 혼자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은 아주 조용한 오후에 찾아왔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집 안을 낮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옷장을 정리하다가 서랍 맨 아래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상자였다.


상자는 나뭇결이 오래된 상처처럼 갈라져 있었다. 누군가 한 번 닫아 둔 뒤 다시 열지 않기로 약속해 둔 것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모르는 척하며 살아왔다. 상자는 집 안에서 가장 말이 없는 물건처럼 보였다.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혼자 품고 있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오래 묻혀 있던 공기가 천천히 풀려나왔다. 종이와 먼지가 뒤섞인 냄새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마치 시간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상자 안에는 사진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빛이 조금 바랜 필름 사진들이 서로의 모서리를 기대고 누워 있었다.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속 하늘은 짙은 파란빛으로 번져 있었고 모래사장은 햇빛을 머금은 노란빛으로 반짝였다. 유치원 운동회 사진 속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사진을 몇 장 넘기다가 맨 아래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손에 닿는 감촉이 사진과 달랐다. 그것은 필름처럼 반투명한 종이였다.


회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작은 화면 속에 둥근 그림자가 떠 있었다. 물속에서 막 피어나려는 씨앗 같은 형체였다. 빛이 닿은 부분은 은빛으로 번져 있었고 어둠은 잉크처럼 깊었다. 나는 종이를 한동안 손바닥 위에 올려 둔 채 바라보았다. 사진 아래에는 또박또박 적힌 날짜가 있었다.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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