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리웁다 #11
5월인데, 비는 마치 4월처럼
너무도 적막하고 조신하게 내리고 있다.
빗속을 걸어 H와 나란히 어린이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혼자 역까지 걸어갔다.
비 내리는 역사는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그래도 꽤 운치 있고 나름 분위기가 있었다.
철길 위로 굵어지는 빗방울들.
책을 읽다가 잠깐잠깐 시선을 들어
하늘과 건물과 철길과
그 철길 사이에 질서 있게 쌓여있는
자갈들을 바라보았다.
내게는 비 내리는 역에 관한
낭만적인 추억은 없지만,
아마도 오늘부터 비 오는 역사의 분위기가
나의 삶 속에, 마음속에
조붓이 들어가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오늘의 이 분위기를,
이 느낌을 추억하며
'그때, 참... 좋았어...'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을 테지....
그렇다.
오늘은 그냥 차분하게,
그렇게 담담하고 평화롭게
마음이... 참으로 좋다.
봄비의 매력은 수선스럽지 않고,
괴팍하지도 않고,
까슬거리는 삼베 이불처럼 적당해서 좋다.
오랜만에 정말,
나는 이 비 내리는 날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우산을 쓰고 걸으며
나의 앞으로 지나가는 모녀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어릴 것 같은 엄마.
그리고 H 정도일 것 같은 어린 딸.
그들을 바라보며 H에게
우산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우산을 하나 꺼내자,
H가 ‘나도' 하고 말했다.
요즘 부쩍 '나도'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제는 소유 개념이 생기면서
엄마 것과 자기 것이 구분되고
엄마가 가진 것을 자기도 가지고 싶다는
아이의 욕망까지 드러내게 된 것이다.
나는 '하나만 있으면 돼.'하고 말하며
우산을 펼쳐 들었었다.
우산을 자기 손으로 들고 싶었던 H는
내게 안아 달라고 했다.
안겨서 우산대를 붙들고 싶은 것이다.
나로서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나의 가방과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또 우산까지 들고
H를 업어줄, 안아줄 손은 없는 것이다.
결국 한 손으로 H의 손을 잡고,
한 손에 가방 두 개와 우산을 모두 들고
그렇게 빗길을 걸었다.
다행히 빗줄기가 거세지 않아서
작은 우산 하나로도 H와 내가 비 맞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이제는 H에게 우산을 사 줄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내 품에 안고 한 우산을 쓰기에는
이제는 H가 너무 커 버린 것이다.
아직도 어린아이지만,
이제는 차츰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늘어가는 때.
그러니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작은 우산 하나 쥐어줘도 될 듯하다.
그럼, 또 앞도 보지 않고 우헤헤 뛰어가 버리겠지?
그래. 멋진 캐릭터 우산도 많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투명 우산이 좋겠다.
그리고, 이쁜 노란 비옷과 장화도 장만해야겠다.
나 어릴 적 항상 입어보고 신고 싶었던 비옷과 장화.
H가 입으면 아마도 더 신나 하겠지....
결국 비 오는 날의 느긋한 감상도
아들 녀석 하고 결부되어 버리네.
그래, 그래서 엄마는
항상 아이들 생각하느라 겨를이 없는 거겠지....
2008. 5. 21.
2026. 3. 20.
그 당시 망우역은
이름부터 나를 위로하는 곳이었다.
망우(忘憂)라니!
정말 나에게 필요한 장소가 아닌가.
늘 걱정을 껴안고 사는 나에게
안성맞춤인 역사.
그곳에 앉아 있으면 홀가분했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항상 가슴이 설렜다.
늘 어디론가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심 걱정 다 버리고
밝은 빛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차는...
내게 기차는 그런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
나는 이제 갈대가 많은 벌판에 서 있다.
키 높은 갈대 속에 서서 발돋움을 해 본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작은 것 같아서
더욱 까치발을 해본다.
다음 장소는 어디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좀 더 나은 내가 되어 있길 바란다.
장소가 어디든
그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넉넉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