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술이 사람에게 주는 자유와 통제의 양면성

자유로운 만큼 바빠지는 역설

by NOAH KIM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표지.png


[먼저 보기 : 17. AI를 전제로 평가받는 사람이 늘고 있다.]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18


[더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 왜 우리는 더 자주 일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기술은

분명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전보다 더 빨리 답할 수 있고,

더 빨리 정리할 수 있고,

꼭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아도

일을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변화는 분명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

원하면 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고,

시간을 더 잘게 나눠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술은

오랫동안 해방의 언어로 말해졌습니다.


묶여 있던 사람을 풀어주고,

굳어 있던 방식을 유연하게 만들고,

더 효율적이고 더 자율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더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

더 자주 바쁘고,

더 유연해진 것 같은데

더 자주 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보다 자리를 덜 지키게 됐는데도

예전보다 일이 더 오래 따라붙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기술이 주는 자율성이

언제나 그대로 휴식과 여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부터 봐야 합니다.


조직학자 Melissa Mazmanian,

Wanda J. Orlikowski, JoAnne Yates의

자율성의 역설(The Autonomy Paradox)

모바일 이메일 기기와 같은 연결 기술이

사람에게 일의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자율성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연결성과 접근 가능성을

스스로 재생산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기술은 자유를 늘려주기도 하지만

그 자유가 곧바로 더 큰 자기통제와 더 잦은 응답 의무로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기술이 사람을 더 바쁘게 만드는지 조금 선명해집니다.


예전에는

자리에 없으면 일을 안 하는 것으로 분리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답장은 나중에 해도 되지만

메시지는 이미 도착해 있고,

자료는 내 손 안에 있고,

초안은 어디서든 바로 만들 수 있습니다.


즉, 기술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일을 미룰 수 없는 환경도 함께 만듭니다.


사람은

억지로 시켜서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게 되면,

그리고 다들 그 정도는 할 수 있게 되면,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상태로 바뀌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기술은 편리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일을 삶 안으로 더 깊이 들여오는 장치가 됩니다.


이 장면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직행동학자 Blake E. Ashforth, Glen E. Kreiner,

Mel Fugate의 경계 이론(Boundary Theory)

사람이 일과 비일상, 한 역할과 다른 역할 사이를 오가며 살아갈 때

그 경계가 얼마나 분명한지, 얼마나 자주 넘나들게 되는지가

경험의 질을 크게 바꿀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역할 사이 경계가 분명할수록 전환은 비교적 선명하지만,

경계가 얇고 쉽게 침투될수록 한 역할의 요구가

다른 역할 안으로 자주 들어오게 됩니다.


이 이론은

왜 기술이 사람을 늘 바쁘게 느끼게 만드는지 아주 잘 설명합니다.


예전보다 일과 삶의 경계는 더 유연해졌습니다.

문제는

유연성이 항상 편안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취준생은

하루를 쉬는 것 같아도

문득 자소서 생각이 들어오고,

갑자기 채용 공고를 확인하게 되고,

남들은 뭘 준비하는지 다시 검색하게 됩니다.


직장인은

퇴근했어도

메신저 알림 하나에 다시 일 모드로 돌아가고,

주말에도

다음 주 회의 자료가 머릿속에 남습니다.


이직 준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을 하면서도

계속 이력서를 손보고,

채용공고를 읽고,

언제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즉, 기술은

시간을 절약해주는 동시에

경계를 얇게 만듭니다.


그 얇아진 경계 속에서

일은 더 이상 “하는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머리 한쪽에 열려 있는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이게 바로

많은 사람들이 요즘 느끼는 피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 피로는

꼭 오래 일해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항상 일에 닿을 수 있는 상태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술은 편리할수록

사람에게 더 적은 부담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경험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경영정보학자 Monideepa Tarafdar, Qiang Tu,

Bhanu S. Ragu-Nathan, T. S. Ragu-Nathan의

테크노스트레스(Technostress)

정보기술이 사용자의 역할 스트레스와 생산성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특히 기술이 과부하, 침해, 복잡성, 불안, 불확실성을 만들 때

사람이 심리적으로 더 큰 압박을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기술은 단지 일을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라

때로는 일을 더 많이, 더 자주, 더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 자체를 낳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개념을 가져오면

왜 기술이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사람을

더 바쁘게 만드는지 더 또렷해집니다.


기술은

불편을 줄여주지만

그만큼 더 많은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가능해진 일은

곧 기대가 되고,

기대는 곧 기준이 되고,

기준은 곧 압박이 됩니다.


답장을 빨리 보낼 수 있게 되면

빨리 답장하는 것이 기대가 되고,

초안을 빨리 만들 수 있게 되면

빨리 초안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 되고,

정보를 빠르게 찾을 수 있게 되면

준비 속도 자체가 평가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술은

사람을 덜 바쁘게 만드는 대신

더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이 변화는

조용히 일어납니다.


누가 직접

“더 많이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람은 스스로

더 빨리 해야 할 것 같고,

더 자주 응답해야 할 것 같고,

이 정도는 당연히 해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바쁨은

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된 기준으로도 들어옵니다.

바로 그 점이

요즘의 피로를 더 설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분명 기술은

우리를 덜 고생하게 만든 것 같은데,

왜 마음은 더 자주 쫓기고

왜 일은 더 자주 삶 안으로 스며드는가.


그 이유는

기술이 단순히 노동을 줄여주지 않고,

노동의 방식과 경계, 기대 수준까지 함께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바쁨은

할 일이 많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항상 연결되어 있고,

항상 반응 가능해야 하고,

항상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기술은 왜 사람을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더 바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은

기술이 나빠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이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술이 조직과 시장의 기대 안에

너무 빨리 흡수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더 유연해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더 자주 호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빠르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빨리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도 함께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술은

해방이면서도 압박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같은 변화의 두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남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기술을 쓰기 시작하면

도대체 무엇이 다시 경쟁력이 되는 걸까요.


예전에는

도구를 먼저 아는 사람이 앞서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들 비슷한 도구를 쓰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음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게 될까요.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모두가 AI를 쓰기 시작하면

무엇이 다시 경쟁력이 되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앞으로의 차이는

도구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도구를 어떤 맥락에 붙이고 어떤 판단으로 완성하느냐에서

다시 벌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음글 보기 : 19. 모두가 AI를 쓰는 오늘, 무엇이 경쟁력인가?]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20


[참고문헌]


Ashforth, B. E., Kreiner, G. E., & Fugate, M. (2000). All in a day’s work: Boundaries and micro role transitions.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25(3), 472–491.


Mazmanian, M., Orlikowski, W. J., & Yates, J. A. (2013). The autonomy paradox: The implications of mobile email devices for knowledge professionals. Organization Science, 24(5), 1337–1357.


Tarafdar, M., Tu, Q., Ragu-Nathan, B. S., & Ragu-Nathan, T. S. (2007). The impact of technostress on role stress and productivity. Journal of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24(1), 30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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