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이제 기본값이자 패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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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요한 것은 도구를 아느냐가 아니라, 그 도구가 이미 기준이 된 환경에서 어떻게 읽히느냐다]
처음 AI가 본격적으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건 먼저 배우는 사람이 유리하겠지.
저건 잘 쓰는 사람이 앞서가겠지.
저건 빨리 적응하는 사람이 무기가 될 수 있겠지.
그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먼저 쓰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먼저 익힌 사람이 앞서 보이고,
먼저 연결한 사람이 더 유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기술은
일정한 시점을 지나면
무기에서 기준으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은 AI도 쓰네”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이제 저 정도는 다들 하지 않나”가 됩니다.
차별화의 도구가
기본값으로 이동하는 순간입니다.
이때부터 경쟁은 바뀝니다.
누가 AI를 쓰는가 보다
누가 AI를 전제로 평가받는 환경 안에 들어와 있는가가 더 중요해집니다.
취준생은
이제 단지 자기소개서를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AI를 활용해 더 정리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직장인도
그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AI를 전제로 더 빠르게 초안을 만들고, 더 정리된 산출을 낼 수 있는 사람으로 기대받기 시작합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력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구를 자기 일에 붙일 수 있는 사람 인가까지 함께 읽힙니다.
즉, AI는
어떤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기술에서
점점 어떤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환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이 실제 과업과 얼마나 맞물리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경영정보학자 Dale L. Goodhue와 Ronald L. Thompson의
기술-과업 적합 이론(Task-Technology Fit)은
기술이 단지 존재한다고 해서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사용자가 해야 하는 과업과 얼마나 잘 맞는가에 따라
성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중요한 것은 기술의 새로움만이 아니라
그 기술이 실제 업무와 과제를 얼마나 잘 받쳐주는가라는 뜻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AI가 빠르게 기준이 되어가는지도 이해가 쉽습니다.
AI는
단지 멋진 기술이어서 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서 초안, 자료 정리, 문장 구성, 정보 탐색, 요약, 아이디어 확장처럼
많은 사람의 실제 과업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훨씬 빨리 일상으로 들어옵니다.
즉, 지금 AI는
“있으면 좋은 기술”이 아니라
“있으면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입의 속도도 빠르고,
기대의 변화도 빠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퍼지는 것과
기술이 일상이 되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회학자 Carl R. May와 Tracy Finch의
정상화 과정 이론(Normalization Process Theory)은
새로운 기술이나 실천이 조직과 일상 속에 들어와
사람들이 그것을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쓰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새로운 도구가 한 번 소개되는 것보다
그 도구가 “이제는 원래 이렇게 하는 것”처럼
자리 잡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이론을 AI에 가져오면
바로 지금 벌어지는 변화가 보입니다.
AI는 아직도 새롭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신기해서 써봅니다.
그다음엔 편해서 씁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면
안 쓰면 불안해서 쓰게 됩니다.
이때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 되고,
습관이 아니라 기대가 되며,
기대가 아니라 평가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AI를 쓸 수 있느냐보다
AI가 이미 들어온 환경에서
당신이 어느 수준의 생산성과 정리력,
반응 속도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됩니다.
이 변화는
사람을 더 자유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은근한 압박을 만듭니다.
누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기준은 올라갑니다.
예전에는
이 정도 정리면 괜찮았던 문서가
이제는 더 빠르고 더 매끄러워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정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제는 빨리 찾지 못하면
준비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초안을 쓰는 데 오래 걸려도
성실해 보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초안 자체보다
그다음을 얼마나 잘 다듬느냐가 더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즉, AI는
노동을 줄여주는 동시에
노동의 기준도 다시 그립니다.
이 지점에서
기술을 혼자 놓고 봐서는 안 됩니다.
조직심리학과 조직설계 연구에서 출발한
Eric L. Trist와 Ken Bamforth의
사회기술시스템 이론(Sociotechnical Systems Theory)은
성과는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기술과 사람, 역할과 관계, 작업 방식이 함께 맞물릴 때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기술이 바뀌면
일의 내용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협업의 방식, 기대의 구조, 평가의 기준도 함께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AI가 바꾸는 것은 개인의 생산성만이 아닙니다.
팀이 일하는 방식도 바뀌고,
조직이 결과를 기대하는 방식도 바뀌고,
성과를 설명하는 언어도 바뀝니다.
어떤 사람은
AI 덕분에 더 빨리 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사람을 둘러싼 조직도
“이제 그 정도 속도는 가능하지 않나”라고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I는
개인의 무기인 동시에
집단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경쟁이 다시 설계됩니다.
이제 차이는
AI를 쓰느냐 마느냐에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누가 더 잘 묻는가,
누가 더 잘 다듬는가,
누가 더 자연스럽게 자기 과업과 연결하는가,
누가 AI를 쓴 뒤에도 더 설득력 있게 결과를 완성하는가에서
다시 차이가 생깁니다.
그래서 AI는
경쟁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쟁의 위치를 옮깁니다.
예전에는
정보를 찾는 능력 자체가 차이였다면,
이제는 찾은 정보를 어떻게 구조화하느냐가 차이가 됩니다.
예전에는
초안을 쓰는 것이 큰 노동이었다면,
이제는 초안을 넘어서
어떤 판단을 더하느냐가 차이가 됩니다.
예전에는
도구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면,
이제는 도구를 안다는 사실 자체로는
더 이상 오래 앞서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불안은
AI를 몰라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자주
AI가 이미 들어온 세계에서
나는 어느 수준으로 평가받게 될까 하는 감각에서 생깁니다.
취준생은
이제 준비의 성실함만으로 충분한지 묻게 되고,
직장인은
이제 경험만으로 충분한지 묻게 되고,
이직 준비자는
이제 경력만으로 충분한지 묻게 됩니다.
이 질문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단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기 기준을 다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피로는
새로운 것을 익히는 피로만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준이 들어온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읽히게 만들어야 하는 피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제 늘고 있는 것은
AI를 잘 쓰는 사람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AI를 전제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조용하게,
더 넓게,
더 일상적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봐야 할 것은
AI를 잘 쓰는 법만이 아닙니다.
기술은 왜 사람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동시에 더 바쁘게 만드는 걸까요?
왜 편해진 만큼 쉬게 되는 것이 아니라,
편해진 만큼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할 것처럼 느껴질까요?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지점,
기술은 왜 사람을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더 바쁘게 만드는 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문제는
AI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AI가 들어오자마자 그 편리함을 곧바로 새로운 의무로 바꿔버리는
환경의 속도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https://brunch.co.kr/@da710e75f6be463/19
Goodhue, D. L., & Thompson, R. L. (1995). Task-technology fit and individual performance. MIS Quarterly, 19(2), 213–236.
May, C., & Finch, T. (2009). Implementing, embedding, and integrating practices: An outline of normalization process theory. Sociology, 43(3), 535–554.
Trist, E. L., & Bamforth, K. W. (1951). Some social and psychological consequences of the longwall method of coal-getting: An examination of the psychological situation and defences of a work group in relation to the social structure and technological content of the work system. Human Relations, 4(1),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