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이 자라지를 않는다.
"그 수박씨 이번에 가져갈거지?"
"가져갈거야, 가져가서 심을거야"
"꼭 가져가야해"
수박씨를 가져가라는 말에는 지저분하니까 치워 그리고 그거 가져간다고 아무일도 없을거야 같은 마음이 복잡하게 담겨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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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식물을 열심히 키워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일에서 비롯되었다.
마트에서 사 온 수박에는 수박씨가 상당히 많았고 - 물론 나는 일일이 뱉는 쪽이 아니라, 씹어서 과육과 함께 삼켜내는 스타일이지만 - 뱉어내는 스타일의 한 사람이 뱉어낸 씨앗과 나의 입에서 억지로 뱉어내 나온 씨앗을 함께 고루고루 모아 싱크대 한 켠에 두었다. 그러자 모아둔 씨앗이 지저분하게 보였던 것 같다. '언제 치우냐?'로 시작해서 '그거 심는다고 자랄까?'하는 의심의 문장들을 삼켜봐야 소화되지 않는 수박씨처럼 마구 뱉어냈을 때 즈음. 나는 수박씨를 '우려내는 다시 백(bag)'에 - 담을 만한 곳이 없었고, 담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 담아 본가로 가져갔다.
그렇게 수 십개의 씨앗을 다시백에서부터 본가에 있는 작은 땅에다가 마구잡이로 흩뿌리고 돌아와서 - 심는 것도 아니고 흩뿌리는 것도 아니라 그냥 대충 집어 던졌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2주에서 3주 지났던 것 같다. 다시 찾은 작은 땅에는 수박의 줄기가 엄청나게 자라 있었다. 실은 '이거 수박 맞나?' 하고 의심하며 구글 이미지에서 수박 줄기를 찾아 보자마자 단번에, '이것은 수박이다!'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와! 우와! 수박이 자랐네!!"
"봐, 내가 뭐랬어? 수박 자랄거라고 했지? 수박 기른다고 했지!"
"우와 신기하다 그 씨앗에서 저렇게 자랐네"
"수박이 나와도 나 구박한 사람은 안 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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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잘 자라는 수박의 생명력을 보면서 집에 있는 세티가 - 포인세티아의 '세티' - 문득 좁은 화분 안에서도 열심히 잘 자라는 모습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세티의 화분을 갈아주고 올 겨울까지도 예쁘게 자라라는 마음으로 갈아줌과 동시에 새식구인 박훈 - 바질이라서 바군 혹은 바!쿤!으로 불렀던 - 바질심기도 같이 했는데, 지금까지 박훈은 새싹조차 올라오지 않고 있다.
반면, 세티는 너무나도 싱그러운 듯한 표정으로 - 식물에 표정이 있다면 - 초록을 더욱 크게 틔워내고 있다. 뭐가 문제일지 몰라서 박훈의 씨앗을 좀더 위로 나오게 손가락으로 뒤적이며 위아래를 바꿔주기도 했는데. 지금 딱 10일차이지만 자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기분으로 흙만 무덤덤하게 평평한 표정이다.
광합성을 더욱 돕기 위해서 해가 드는 자리에 놓아주기도 하고, 창을 열어서 들어오는 바람과 해를 잘 맞게끔 해주면서 계속 세티의 싱그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박훈도 함께 하고 있으나 박훈은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기세 좋게 너무 빨리 '식물일기를 써야겠다'하고 설레발을 쳤던 게 화근이었나. 하며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여보지만. 아마 씨앗을 심을 때 뭔가 잘못됐나 싶다. '바질페스토 먹는 건 어려운 일인데?' 라는 마음으로 두 번째 박훈을 - 박훈 Jr (쥬니어) 라는 이름까지 생각해두었다 - 다이소에 가서 입양해올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수박처럼 가만히 심어 두면 어떻게든 되겠지
10일째, "박훈, 안 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