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아요
인문계 고졸로 강남에 내던져진 1996년.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 아니면, 재수생 신분으로 새로 태어나지만, 나는 인문계 고졸로 남아 강남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각종 학원수강생으로.
아침 7시 중국어학원으로 시작해, 셀프조식을 마치고, 10시부터 영어학원 두시간. 셀프점심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가 오전 복습을 마치고, 4시엔 일본어학원. 셀프디너 후엔 두시간 컴퓨터학원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생활을 선택한건 그 누구도 아닌 나다.
고등학교 입학식날, 아버지는 가볼데가 있다며 차로 10여분 거리의 그곳. 서울대학교로 나를 데려 가셨다.
공부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 중학교때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입학식날만큼은 아버지는 기대를 하신 것 같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는데.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아니더라도 좋은 대학 가고 싶었는데 현실은 달랐다.
서울대학교를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딸아이의 성적으로는 재수를 한다해도 서울대는 커녕 서울안에 대학을 간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아버지는 당시에 있을 수 없는 커리큘럼을 제안하셨고, 그렇게 나의 강남에서의 학원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나면 그 누구보다 취업이 잘 될거라는 아버지의 확신을 나도 믿고 싶었으므로.
그렇게 여러학원 생활을 시작해서 열심히 다니던 어느 초여름날, 새벽반 중국어학원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J씨는 왜 대학에 가지 않아요?"
"재수해도 좋은 대학 가지 못하느니,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해서요...그리고, 지금부터 해서 될까요?"
"지금부터라도 전문대 목표로 해봐요~ 재수학원 다니는 친구들도 반팔입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공부시작하니"
그렇게 다시 대학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지만, 아버지에게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딸이 될 것이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엄마에게만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엄마는 큰딸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사는게 중요하다시며, 재수학원 학원비를 흔쾌히 지원해 주셨다. (재수해서 전문대도 못가면 그 돈은 벌어 갚아드리기로 하고)
그렇게 나의 반수 아닌 반수 생활이 시작되고, 목표로 한 대학에 아니, 전문대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중국어를 반년이상 배우고 들어간 나는, 학기초부터 장학금을 휩쓸기 시작했고, 1년 늦게 들어간 대학생활은 즐겁기만 하였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니, 잘하는 것을 꾸준히 좋아하게 되는 습관이 생긴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중국어스터디를 만들고 주도하며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 중국어를 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꾸준히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자고 다독여주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기쁘기만 하였다.
다음 직장에서도 책을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하는 독서모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궁궐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궁궐동호회도 나가고, 걷기 좋아해서 걷기동호회도 나가고 하게 되는 것은 스무살에 시작된 진짜 공부덕분이 아닌가 싶다. 스무살의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도 그 때 그 선택을 할 것 같다.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배우는 것이 취미가 되어, 아이가 방과후수업으로 배우는 우쿨렐레를 엄마도 배우고 있고, 아이가 배우는 영어를 다시 공부하고 있고, 아이와 함께 읽고 싶어 함께 도서관을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내가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님의 < 최재천의 공부 > 라는 책에
" 일부 색다른 짓을 하는 아이들까지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스템을 다양화해서 일부는 그냥 좀 괴짜로 클 수 있게 해주면 참 좋겠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우리 아이들도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라며,
스무살에 시작된 나의 진짜공부는 두번째 스무살, 세번째 스무살을 향해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