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상
버뱅크는 엘에이 카운티 중에서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역인 Valley Area에 속해있다. 대구의 여름이 그렇듯 이곳의 평균기온도 해안가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아서 한인들 사이에선 '불뱅크'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여름 산에는 소철과 선인장 종류 말고는 더위와 햇볕에 풀들이 말라버려서 흡사 불쏘시개 같은 덤불들만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실제로 너무 더운 날 바람이라도 불면 이런 풀들의 마찰로 산불이 발생한다). 그러나 하이킹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고마운 산들과 트레일이 지척지간에 산재해 있어 사랑스러운 곳이다.
엘에이 주변에 가장 유명한 하이킹 코스로는 라라랜드에서도 나왔던 Griffith Park를 들 수 있겠다. 등산로들도 큼직큼직하고 공원 내 잘 가꿔진 쉼터들과 그리피스 천문대를 들러 정상에 도착하면 엘에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차가 쉽지는 않지만 엘에이의 랜드마크 Hollywood 싸인에 가장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는 Innsdale Trail도 명소이다. 좀 더 멀리는 말리부나 산타모니카 근처의 해안가 트레일들도 일품이며 얼마 전 새롭게 알게 된 Switcher Fall Trail은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물과 주위의 나무들로 엘에이답지 않은 초록의 산행길을 경험할 수 있다. 트레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단연: https://www.alltrails.com/
산행을 하기 가장 좋을 때는 겨울이다. 반년이 넘게 사막의 모습으로 하고 있다가도 우기 들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민둥산들에도 잡목과 잡풀이 초록초록하게 산을 메꾸기 시작한다. 햇살은 여름에 비해 턱없이 순하여 하루 중 언제나 즐겁게 산행을 즐길 수 있으며 운 좋은 이른 아침에는 그 풀들을 먹다가 들킨 산토끼들이 깡총 사라지는 구경을 할 수 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날은 비가 내린 다음날. 비에 젖은 땅냄새가 폴폴 나는 것이 한국 봄날의 산보를 생각나게 하며 정상에 올라가서 스모그 없는 맑은 하늘에 폭 쌓여 있는 버뱅크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포만감도 즐겁다. 무엇보다 여기저기서 본 적도 없는 야생화들이 피어나는 모습은 (나이가 들어서 인가? 쿨럭) 대견하고 아름다워서 사진으로 찍지 않을 수가 없다.
문득 선선한 아침에 생각나는 산행. 헐떡거리는 숨을 돌리고 있을 때 한걸음만 더 올라와 보라고 격려해 주고, 정상이 아닌 어느 오름에서도 한숨 돌릴 아름다운 경치를 내어주며,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내려가는 길에 계곡물로 따라와 말 걸어 주는 다정한 트레일들. 늘 거기 있어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