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하는 치과의사입니다만!

중국어에 배신당했달까

by 섬세한 시골 의사

90년대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매년 명절이나 토요 특선 영화엔 성룡, 이연걸 같은 홍콩액션영화가 자주 나왔다. 스토리는 전혀 전혀 모르겠고, 그 현란한 움직임을 막 따라 하곤 했다.

나 때는 비디오대여점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당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인기가 많아서, 오래된 홍콩영화를 빌리는 건, 가격도 싸고, 빌리기도 쉬웠다. 70,80년 생 남자라면 이해할 것이다. 만화책 대여점이나 비디오대여점엔 인기 있거나 최신 작품들이 더 비쌌고,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해서 대여점에 갈 때마다 누가 빌려가서 없던 날도 많았다. (아재들 기억나는가, 비디오테이프커버가 거꾸로 꽂혀있으면 , 누가 먼저 빌려간 것이다!)

홍콩영화.png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하노스의 장막

아무튼, 홍콩영화의 동경은 그때부터였고,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는 '중국어'를 배워보기로 결심했다! 중국어를 배워서 홍콩에 가보리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자막 없이 원작 느낌 그대로 느끼리라!

유튜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피시방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해서, 집에선 인터넷도 못했던 시절이다. 너무 아재인가.... ㅠ

동네 서점 가서 '왕초보도 할 수 있는 독학 중국어' 책을 샀다. 그 책엔 강의용 카세트테이프가 있었고, 그걸 들어가며, 테이프에 나오는 중국어 소리를 흉내 내었다.


'니 하오, 씨에씨에' '니하오, 씨에씨에'


어느 날은 대학가 앞에 놀러 갔는데, 어학원이라는 걸 보았다. '학원은 국영수 피아노 미술학원' 이런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어학원 간판에는 '토익, 영어회화, 일본어, 중국어 개강!'이라고 되어 있었다.


'중국어.......? 중국어 학원이 있었어?! '


당장 어머니에게 학원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고, 중학생인 나는 그날부터 , 대학생 형 누나들과 중국어 기초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어머니는 내심 걱정이 되셨나 보다. 아들이 학교 공부는 게을리하고 , 중국어만 붙잡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 말 좀 들어봐 봐. 제2외국어를 미리 배워두면, 고등학교 때 중요과목 공부에 집중할 수 있지 않겠나? 내 말이 맞재??"


오... 갑자기 생각해 낸 말이지만, 어머니는 설득당한 거 같다. 흐흐흐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1학년 말, 이과를 가느냐, 문과를 가느냐를 선택해야 한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시간이다.


" 쌤, 나는 중국어를 쪼매 배았기 때문에, 문과에 갈랍니다. 제2외국어는 남들보다 잘할 자신 있습니다. 하하"

" 참나 , 우리 학교 제2외국어는 일본어랑 독일어다 인마. 중국어는 없다. 니는 마 이과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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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뭐라고....?? 중국어가 없어???

일본어는 그렇다 치고....

독일어는 도대체 왜 배우는 거고? 태어나서 독일사람을 본 적도 없고, 살면서 독일에 갈 상상도 못해봤고, 수도도 모른다! 독일에 유명한 게 뭐가 있는데?! 히틀러? 걔가 독일 사람이 가? 나 는 몰 랐 단 말 이 다!!!!


결국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 화가 났는데, 화풀이할 데가 없었다. 중국어 과목이 없어서 이과를 갔다. 수학을 잘하지도 못했다. 가라니까 갔다.


그거 아시는가? 광둥어 (Cantonese)라고, 일종의 중국 사투리이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처럼 중국 대륙의 대부분은 중국 보통화 (Chinese)를 쓰지만, 홍콩은 광둥어를 쓴다. 두 언어는 성조나 발음이 완전히 다르다. 그냥 전혀 다른 언어다. 같은 중국사람이라고 해도, 보통화 쓰는 사람과 광둥어 쓰는 사람은 말이 아예 안 통한다. (예를 들면 "쎄쎼"는 광둥어로 "또재이"이고, '니하오'는 광둥어로 '네이호우'이다.)

나는 홍콩영화를 동경하면서 광둥어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게 그건 줄 알고, 보통화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중국어를 꽤 배웠는데도, 홍콩영화를 주야장천 봐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니..... 분명히 자막은 너무나 쉬운 문장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니까! 난 또 내가 문젠 줄 알았지...


어쨌든, 이것은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배신당했다. 내가 사랑하는 홍콩영화계와 나의 모교에게 배신당한 거다. 왜! 도대체 왜! 같은 나라 말이 이토록 다른 것이며, 우리 학교는 왜 13억 명이나 쓰는 중국어가 제2외국어 과목으로 없는 것이냐, 이 말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때 배운 중국어로 중국 배낭여행도 다녀온 적 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소 '이주민과 함께'라는 단체에 봉사활동을 나가고 있는데, 그때 중국인 환자를 만나면, 통역 없이 소통하고 있다. 네팔이나 파키스탄 등에서 오신 외국인 노동자 분들은 간단한 영어와 통역기를 통해서 소통하지만, 중국 환자분들은 영어를 아예 못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럴 때 내가 중국어를 하고 있으면, 자원봉사자들이 신기하게 쳐다보곤 한다.


"와아 영어 잘하시는 의사 선생님은 봤지만, 중국어 하시는 의사 선생님은 처음 봐요 ~"

"하하.. 이 정도는 뭐 ㅎㅎㅎㅎ"


중국 환자 분들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의사가 있으니, 훨씬 더 반가워해 주신다.

앗 잠깐 홍보하자면, '이주민과 함께'는 언제나 자원봉사자 분들을 환영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ㅎㅎ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중학생 때 배운 중국어를 조금조금 써먹고 있긴 한데,

홍콩영화를 동경하던 그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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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자막 없이 홍콩영화를 못 본다고 한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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