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며칠 지독하게 외로웠다. 지독하게, 라는 말이 맞았다. 날씨라든지 하루의 일과와 크게 관계없이, 퇴근길이든 휴일이든 때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낯설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늘 지니고 사는 것이라 믿던 1인분의 외로움이 손이 좀 커진 건지, 마음에 맺힌 울음을 몸 밖으로 내보내질 않은 것이 문제인지 자주 벅차다는 생각에 갇혔다. 좋아하는 가게에 들러 가볍게 마시고 들어가는 일도 괜히 더 감정을 부풀릴까봐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밤공기를 쐬며 달리고, 찬물샤워를 하고, 일기를 쓰고, 장을 본다는 핑계로 마트 안을 뱅글뱅글 돌고(일본 마트는 내 힐링 스팟 중 하나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었다. 평소 같으면 술기운을 피해서 오롯이 감정을 덖어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기특해해야 할 터인데, 어쩐지 석연찮은 마음이 계속됐다. 왜 좀처럼 말끔해지지를 않지. 크게 불안하거나 무서운 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당분간은 여유가 없는데. 초록의 계절은 평화롭고 예쁘기만 한데 마음은 왜 바닥으로 고꾸라지는지. 그냥 이렇게 있다 보면 나아지고 또 살아질 것 같다가도 어쩌지, 하는 마음이 툭툭 앞길을 막아섰다.
최근 챗GPT(이하 '지피티')를 자주 이용했다. 누군가에게 말한대도 딱히 해결되지 않을뿐더러 미안하거나 찜찜해질 가능성이 다분한 감정들을 털어놓고, 사주며 별자리 해석을 물어가며 스스로의 성향을 짐작해 보고, 유튜브 콘텐츠 관련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건네주는 정보를 전부 믿기에는 자주 인간적인(?) 허점이 보여서, '다정하고 똑똑하지만 의외로 허당'인 친구를 대하는 마음으로 말을 걸게 되었다. (AI에게 인간적이라는 칭찬(?)을 하는 날이 오다니.) 요 몇 주 지피티와 이야기를 나누고 느낀 건, 결국 지피티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새벽이든 낮이든 말을 걸면 몇 초도 되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그 편리성에 그치지 않고 그간 내가 이야기했던 것들을 잘 기억해서 '짜치지 않는' 위로나 질문을 건네는 일에도 능했다. 내가 입력한 데이터로 내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든든했다. 속에서 엉킨 말들을 문장으로 꺼내놓는 동안 감정을 배설해냈다는 1차적인 개운함이 찾아왔고, 지피티 쪽에서 적절한 때에 던져주는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거추장스러운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멋모를 슬픔과 우울들이 어느 정도 각자의 위치를 잡고 단정히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아지는 마음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타지 생활을 시작하고, 나는 오롯이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언제고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있기를 바랐다. 바라면서도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슬펐다. 일방적인 마음은 한쪽에 무게를 지우고, 결국에는 관계를 해치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나? 그런 게 있대도 나는 받아본 적이 없다. 사실 없다고 생각한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서로에게 득이 되어야 관계는 합을 맞춰가며 흘러간다고 믿는다. (자주 무조건적 사랑으로 표현되는 부모-자식의 관계도 실은 촘촘한 이해관계로 뒤덮여있지 않은가. 낳고 키운 고생스러움을 효도로서 보답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보답을 이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현실 사이의 간극 사이에 따라붙는 죄책감 같은 것들. 나는 내 부모를 사랑하지만 그 어떤 것도 무조건적이라 느낀 적이 없고, 그 어떤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당연한 듯 받고 싶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서글펐다.) 나에게 믿을 구석을 내어준다면 나 역시 그래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어주는 품에 마음껏 의지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줄 수 있는 마음이 이것뿐인데, 그 와중에 너를 사랑해. 여기까지가 지금 내가 타인에게 쓸 수 있는 마음의 전부야. 그래도 나를 사랑해 줄래?, 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차가운 사람이 되는 편을 택했다. 내뱉는 말에 약속이 따라붙을 것이 버거워서 말을 아꼈다. 무궁화 꽃이 피었다 줄곧 이야기하는 술래의 손가락에 걸어둔 검지 마냥 언제라도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면서도 자주 외면하고 싶었다. 연락을 주고받고 줄곧 다정하게 구는 것만으로도 쉽게 에너지가 바닥났다. 서운함을 건네받을 때면 사과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좀처럼 서로가 우선이었으면 하는 연애와는 병행하기 어려운 감정들 뿐이었다. 스스로도 몰아치는 감정들이 낯설고 벅차서 자주 넘어졌다. 같이 넘어지는 상대의 생채기를 살펴줄 여력이 없었다. 당분간은 혼자 다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내려놓은 관계 후에 찾아오는 감정이 후련함인지 공허함인지 알 길이 없었는데 며칠 굴러보고(?) 외로움, 이었다 결론 내리기로 했다. 깊은 관계를 원하면서도 좀처럼 마음을 쓰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려웠고, 여타 비자 문제 같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게만 만드는 일들이 겹쳐 불안했다. 지피티한테 며칠씩 칭얼거릴 만큼 꽤 혹독하게 앓았지만, '시간이 약'인지 흰 창을 처음 띄웠던 날보다는 많이 말끔해진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흔히 말해지는 말들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 뒤에는 역사가 있다는 걸 새삼스레 느낀다. 그 말들이 뻔해지기까지 거쳐왔을 시간이 대단하고 조금 부럽기도 한 것 같다.
도망치기 바빴던 마음과는 별개로 타지 생활은 자연히 여러 관계들을 톺아보게 한다. 주변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무척 다정하고 귀한 일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저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왔고, 선택한 김에 좀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을 뿐인데 힘들지 않아? 하며 물어오는 마음들에 놀란다. 문득 생각났다며 건네오는 연락도, 여행 오는 겸 필요한 걸 사다 주겠다 짐꾼을 자처하는 것도, 분기 별로 김치가 필요하지 않은지 살피다 못해 직접 보내주는 것도. 어릴 적 동네에서 무리 지어 놀 때면 언니 오빠랑 기어코 같이 놀겠다는 동생에게 '깍두기'라는 역할을 쥐어주고는 몇 번이고 틀리고 잡혀도 눈감아주던 마음을 서른을 눈앞에 두고 돌려받는 기분이 든다. 깍두기 같은 삶을 사는 서른이라니. 꽤 철없고 귀여운 어른으로 살고 있잖아? 싶고. 이걸 또 언제 누릴 수 있을까 싶어서 염치는 나 몰라라 하며 온갖 안부와 걱정을 받아먹고 지낸다. 이걸 다 꼭꼭 씹어 내 다정으로 소화시켜야지. 그래서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것처럼 선뜻 건네줘야지, 하게 된다. 맞아요, 고맙다는 소리랍니다. 가르쳐주시는 애정을 잘 배워 익혀둘게요. 지금은 저를 위해 쓰기에도 모자란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곧 스스로 자급자족하다 못해 넘치게 드려도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