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닿아 Jan 28. 2021

뭐라도 적자 싶은 밤을 무시하지 않기

1. 궁리 덜어내기


또다. 자려고 누웠다가 새벽이면 불현듯 허리를 펴고 앉는다. 전주인의 오래된 매트리스를 버리고 몇날며칠을 고민하다(매트리스를 처분하고도 결정을 못해서 며칠을 맨바닥에 토퍼 하나 깔아두고 자던 것이 불쑥 떠올랐다. 바닥에서는 도저히 못자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들여온 소파배드는 이럴 때 꽤나 유용하다. 옆에 있는 간접등을 밝히고 일어나 앉으면 정강이 쯤 오는 낮은 책상 앞이 된다. 내려와 바닥에 앉으면 좀더 높이가 맞지만 자기 전에 잠깐, 이라는 생각에 좀처럼 내려앉는 법은 없다. 배드테이블 용도로 나온 것이라 그런지 책상이라 하기엔 밥상 정도의 기능이 더 나은 높이지만, 삐걱대던 소파배드의 다리 몇 개가 결국 부서지고 난 후로는 다시 내 책상이 되었다. 집중을 하다보면 자연히 목과 허리가 굽어진다. 보통은 녹음을 할 때 허리가 가장 아프다. 지난 팔 개월 간 했던 메일구독서비스에서 나는 글을 쓰고, 또 그 글을 녹음해 구독자들에게 보냈다. 마이크는 평평한 바닥에서 가장 소리를 잘 잡아내고, 그 소리가 무사히 녹음되려면 앞에는 그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고 금방 부딪힐 만한 장애물이 있어야 한다 (어떤 스튜디오 벽면에 계란 판들이 무수히 붙어있는 것처럼). 여러 번 시도 끝에 이 7평 남짓 자취방에서 가장 좋은 질의 녹음이 가능한 곳은 소파배드와 커튼 행거 사이라는 걸 알아냈다. 좀더 명확히는 소파배드 앞에 앉아 커튼행거 쪽을 바라볼 때. 소파에서 내려와 그 아래 등을 대고 앉듯 배드에서 내려와 책상 앞에 앉아 녹음을 하는데, 책상의 높이는 그래봤자 내 배꼽 조금 위라서, 결국은 마이크 가까이로 몸이 굽는다. 한참을 녹음하고 날 때면 뻐근한 허리를 천천히 펴내고 죄책감에 이리저리 몸을 늘이고 폼롤러 위에 굴린다.



모델 일을 한 지 어언 삼 년이 넘었다. 어렸던 연애가 끝나고 살이 잔뜩 빠졌을 때, 기록하는 즐거움 정도로 삼던 촬영에 욕심이 붙었다. 스물 셋 광복절 아침, 암막커튼 사이로 스미는 빛으로 겨우 시간을 가늠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했던 작업. 터닝 포인트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퍽 하나의 기점같은 순간으로 남았다. 내 오른쪽 왼쪽 얼굴 중 어디가 예쁜 지를 고민하는 일보다 나와 작업한 이들과 사진 한 장에 같이 매료되고 감탄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고, 촬영 도중 온전히 몰입해서 자연스레 표정과 몸짓을 바꾸는 순간이 결과물보다 더 그리워졌다. 모델구인사이트에 프로필을 넣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작업을 더 하고, 종종 먼저 찾아지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이 그새 삼 년을 훌쩍 넘겼다. 돈도 조금씩 벌기 시작했고, 이제는 직업이 되었다. 햇수로는 사 년 째라는 건데, 여전히 전업에 자신이 없다. 상업모델로 있는 것에 수완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잔고를 보고 알았다. 무사히 자취생활을 이어나가려 파트타임을 덧대고, 다른 좋아하는 일을 덧대면서 지낸다. 꾸준히 하다보면 이 일들이 어떻게 어디서 이어질 지 몰라, 하는 막연한 안정감을 구석에 품고, 나를 달래며 어떤 방식으로든 좋아하는 것들을 놓지 않는다. 글도 그렇고, 모델도 그렇고, 유투브도 그렇고.


1월부터 시작하려던 카페일이 어영부영 다음 달로 밀려났다. 어엿한 이십대 후반의 첫달은 그렇게 무서운 금전난과 함께 시작되었다. 단기알바를 찾을 새도 없이 시간이 흘렀고, 가난한 와중에 재미를 또 여럿 알았다. 식비를 아끼려고 드는 작은 장바구니에 새로운 식재료들이 들어왔다. 강릉으로 촬영을 갈 때마다 특식마냥 먹었던 순두부는 집 앞 마트에서 몇 천원에 팔고 있었고, 참기름에 버섯과 고사리를 들들 볶아 먹는 것이 아주 취향에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맥주가 마시고 싶을 땐 유투브 영상이라도 찍으며 구실을 만든다. 대부분 맥주를 마시며 간단한 리뷰를 하는 영상인데, 초반에는 알고있는 자잘한 맥주지식을 하나라도 더 말하려고 애썼다면, 요즘은 그냥 술친구 대하듯이 영상을 꾸민다. 예전이라면 다 덜어냈을 말들을(에둘러 말하면 tmi) 일기 쓰듯 꾹꾹 눌러 담는다. 너무 내 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보다 나가겠지, 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영상을 만들려 애쓰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촬영도 편집도 더 재미있다. 꾸준히 할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느낀다.


맥북이 망가졌다. 지인이 새걸로 바꾸면서 죽어가던 상태로 내게 오긴 했지만, 내 품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시 살리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견적부터 맡겨보아야겠지만, 어떤 견적이 나와도 조금 덜 놀랄 수 있는 잔고가 우선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애인이 빌려준 아이패드로 글을 쓰고, 녹음을 한다. 충분하다 싶다가도 그 외의 작업을 하기에는 확실히 불편하다. 얼른 파트타임을 시작하고 싶다. 모델이 아니더라도 몸을 움직여 돈을 버는 일은 꽤 적성에 맞는다. 일상이 고달프지 않을 정도로는 늘 돈이 있으면 좋겠다. 근사한 마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근사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고 싶다. 몸과 마음을 다 해 돈을 벌고 싶다. 나는 쉰 적이 없는데 일을 받지 못하면 쉰 것이 되는 상황이 밉지만 나는 또 사랑할 수 밖에 없는걸. 조금이라도 오전 운동을 해내고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는 이유는 분명한 걸. 내일은 간만에 들어온 촬영을 한다. 퍽 신나서 하게 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잘 할 수 있다. 오전에 잘 일어나서 운동하고 고사리랑 버섯 볶아먹어야지. 먹고 힘내서 으쌰으쌰 촬영하겠습니다. 충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