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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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집착과 종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성숙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착과 종속이 그저 미성숙의 결과라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바꿔 말하면, 집착과 종속이 발생하는 이유는 미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성숙은 나에게 일어난 사건을,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한 일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앞에 무력한 자신을 느끼고, 그 무력함에 잠식되지도 않으며, 자신의 무력함을 망각하고 살아가지도 않는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로 도달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성숙인 것이지요. 어릴 때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게 무자비하게 던져지는 많은 사건들을 그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이별, 상실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은 상실의 경험을 이어붙인 누더기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들이닥친 그리고 들이닥칠 상실을 점점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겠지요. 상실이라는 말로 표현하긴 했습니다만, 요점은 무력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이를테면 어린 나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 화나고, 서럽고, 울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반복된 비슷한 경험 속에서 내가 원할 때 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영원성을 꿈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성은 결코 가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영원성을 가지지 못함, 즉 필멸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해가는 과정이 나이를 먹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성장이지요. 그런데 영원성 뿐 아니라 또 우리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변하지 않는 타인의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타인의 마음은 영원성에 비해 가시적일 뿐 아니라, 그것의 고결함을 선전해온 역사 아래에서 마치 소유할 수 있는 대상처럼 여겨집니다. 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지점에서 집착이 발생합니다.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이 동반된 강한 집념이 바로 집착입니다. 즉 집착은 미성숙의 일부분이 야기하는 문제 중 하나인 것이지요.

집착이 불안에 닿아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이 실존적 어휘로 사용되었을 때에 한해서 말이지만요. 상대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대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서 행하는 무언가는 조금 더 넓은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예컨데 연애 그 자체 말이지요. 저는 연애를 우리가 우리들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행하는 여러 행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연애 역시 미성숙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미성숙을 완전한 성숙 이전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연애를 폄하하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겁니다.).


불안이라는 단어를 실존적 개념이 아닌 일상언어의 영역에서 사용하자면, 연애에서 발생하는 불안감이나 집착이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사실 불안함이 집착을 야기하는 것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불안의 원인이 상대가 나를 떠나갈 것이라는 의심에서 비롯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예컨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충분한 믿음을 주던, 약간의 부족한 믿음을 주던,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던, 불안함을 느낄 사람은 그 불안함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기 때문에, 믿음이 불안함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런고로 충분한 믿음을 주는 것은 집착의 해결책도 불안의 해결책도 되어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불안함이 더 생길수도 있을 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이 완전하게 있다고 해서 불안함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믿음의 부재 여부와 불안은 어떠한 상관성은 띄지만 인과성을 띄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안이 왜 생기느냐고 물으실 수 있을텐데, 또 앞에 한 말을 반복해야겠습니다. 불안은 개인의 실존적 존재의 부재에서 발생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지하고, 그 실존적 부재를 능숙하게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성숙한 개체로, 덜 불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존적 존재의 부재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불안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에 매몰되거나, 타인의 관심 아래 종속되는 순간 집착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연애에서 발생하는 집착이, sns중독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는 대상이 있는 감정이며, 불안은 대상이 없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당신이 말한 연애 상대가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상대방이 확신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 상대방이 떠나갈 것에 대한 공포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랑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어려운건, 대화에는 공유되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사랑에 대한 전제는 너무 모두가 제각각이라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어떤 의견을 내려고 할 때, 이 의견이 지금 당신과 내가 동의하고 있는 어떤 바탕 위에서 내기 타당한 의견인지 고민을 참 많이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야기를 이런식으로 끌고가보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어떤 작품에 드러난 사랑에 대해서요. 그 작품을 보는 사람입장에서는 공유되는 상황에 대한 전제가 있으니, 대화를 나누기가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답을 많이 늦게 드려 참 미안합니다. 나의 답을 당신이 기다리고 있었을지, 잠시 잊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자라면 이제는 없는 종류의 기다림이 당신에게 신선했기를 바라고, 후자라면 갑작스레 보낸 편지가 당신에게 반가웠기를 바랍니다. 늦게 보낸 주제에 뻔뻔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우린 여기서 어떠한 가치를 찾기를 바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