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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키치에 관한 대화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잘 정리해준 듯 합니다. 키치가 잘 활용된다는 것은 다양한 사조가 존중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즉 키치가 이미 그의 전체주의 성향을 발현하지 못하는, 독재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반증한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네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사용할 때에 우리는 흔히 센스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관계의 잣대로 삼아 상대에게 향하도록 하는 일은 독재와 다르지 않다고 정리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좋아하는 웹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공포스럽고 섬뜩한 내용과 문체의 소설로 정상을 찍은 선은호. 이름을 제외한 얼굴, 성별, 나이 어느 것도 대중 앞에서 드러낸 적이 없는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남성이라고 믿습니다. '선 작가님을 설득하면서 이 말도 전해주십시오. 남자라면 더 큰 야망과 포부가 있는 게 당연하고, 외모나 인성에 상관없이... . 훌륭한 필력과 재력을 가진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대중은 없을 거라고.'* 은호의 인터뷰를 싣게 된 잡지사 에디터 유진은 미팅 도중 거물급 투자자인 회장의 이러한 말에 끓는 듯한 분노를 느낍니다. 여기서 유진은 선 작가의 대외적인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하게 은호를 면대면으로 알게 된 인물이기도 하지요. 작품 어디에서도 스스로의 성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유진 주변에서는 유진의 인터뷰를 수락한 은호에 대해 '밝히는 아저씨? 아님 할아버지? 직접 만나니 어땠어? 유진 씨 30대긴 하지만 아가씨 같으니까 혹했나 보네.' 식의 언사를 건네옵니다. 이에 유진은 '선 작가에게 쏟아지는 편견과 무례한 말이 오물 덩어리로 변해 자신에게 투척되는 듯한 모멸감'을 느끼지요. 은호 또한 이러한 상황을 너무도 잘 인지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런 대중의 편견을 역이용하여 일종의 지위감을 유지합니다. 흔히 여성성, 남성성에 관한 키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젠더에 관한 관심이 전체적으로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여전히 이러한 종류의 것들을 마주하니까요.


이 이야기는 이 쯤하고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연애관계에서의 집착을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동시대의 연애만 보아도 수없이 다양한 방식의 사랑을 전시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나 소비를 하는 방식에 따라서 데이트의 모양도 달라질테구요. 일대일의 연애관계를 두고보았을 때 서로가 할 수 있는 애정어린 대부분의 표현이 상대에게 종속됩니다. 상대가 그러하기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람 역시 많지요. 상대의 질투를 곧 사랑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 또한 다반사입니다. (물론 폴리아모리적 사랑을 하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그러한 비독점적 다자연애관념이 서로 간에 합의된다 해도 셋 이상의 사람들끼리 연애를 하려면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대부분의 개인이 운용할 수 있는 시간과 돈 모두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추후에 하고, 먼저 일대일 연애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어떤 연예인 부부가 후배 가수와 식사를 했는데, 남편이 여후배가 깻잎을 잘 못 떼어내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젓가락으로 잘 떼어낼 수 있게 도왔다가 식사자리 후 부부싸움을 했다는 내용의 방송이 나간 후, 인터넷 상에서 이를 가지고 활달한 논쟁이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이러한 종속적 애정 표현이 연애관계를 이끌어나가는 데 어떠한 중요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관계를 쌓아 올리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너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로맨틱하게 들립니다. 지금 이 감정을 나만 받을 수 있다는 유일함이 특별함을 느끼게 하지요. 그리고 그 특별함은 시간이 갈수록 관계 전체로 옮겨갑니다. 연애니까, 연인이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 둘 결정되지요.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모두요. '연인세트', '커플패키지' 같은 말들에도 힘이 붙습니다. 연애는 돈이 듭니다. 그리고 돈이 됩니다. 미디어에서 꾸준히, 그리고 은근슬쩍 '연애하는 상태'를 권장하는 것도 같은 선상의 이유인 듯 합니다. 얼마 전 유투브를 보다 어느 커플 유투버 영상에 달린 '남 연애에 이토록 진심인 한국인들,,'라는 식의 댓글을 보았습니다. 댓글에 달린 좋아요 수 또한 많았지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먹방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는 것처럼, 연애 유투브를 보며 일종의 감정적 대리만족을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마주합니다. 연애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던가, 연애의 꽁냥꽁냥하고 사랑스러운(평소에 자주 쓰는 말인데, 당신과 오래도록 사랑에 관해 논쟁을 하다보니 '사랑'스럽단 말을 쓰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쓰고싶으니 우선 쓰겠습니다.) 모습만을 보고 싶은 경우에 해당하겠지요. 연애의 처음부터 끝을 다 겪고나면, 그 안에 마냥 좋은 순간들만 가득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되니까요. 연애가 끝난 후에 찾아오는 감정 또한 그렇구요. 관계에 특별함을 붙여 건네는 애정이나 기대의 순간이 상대와 어긋날 때, 우리는 어떠한 박탈감을 느끼고는 합니다. 미디어만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는 너를 특별하게 생각했는데, 너는 그렇지 않은가 보구나.', '애정이 식은 것 같아.', '너 나를 사랑하긴 하니?' 식의 말들이 있겠네요.


... '사귀다'라는 말뜻이 언제부터 이렇게 좁아졌을까. 어떤 한 사람을 애인으로 정의해서 삶을 공유하고 연락을 독점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좋은 사람 찾으려고? 왜? 결혼하려고? 왜? 그럼 그걸 왜 그리도 쉽게 일순간의 감정으로 정해 몸을 던지고 배신당했다며 상처를 받고 무너지나. 그걸 사랑이라 한다면, 성적인 사랑은 황홀한 만큼 빠르게 많은 감정들을 태우고 사라진다는 건데 왜 그 짧은 감정에 함부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지? 외로워서? 사람은 혼자 못 사니까?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된 관계는... 외로움을 사랑으로 포장해서 위로만 파먹는 일밖에 더 되나 그런 생각을 해. **

역시 좋아하는 웹툰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감정은 불변한 것이 될 수 없지요. 영원이 그토록 사랑을 말하는 노랫말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좀처럼 가능하지 않은 것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에 가까운 이유가 아닐까요.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둘의 사랑이 늘 일정하게 아름다웠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요. 싸움 한 번 없이 예쁘게 사랑하며 시간이 쌓인 것일 수도 있고, 여러 번 싸우고 부딪히고 다쳐가며 서로에게 꼭 맞는 모습으로 맞춰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을테지요.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를 구분해 생각하라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근거도 비슷한 곳에 있습니다. 사랑만 가지고 살 수 있을 것 같냐, 평생 죽고 못사는 건 잠깐이다, 잠깐의 감정에 속지 말고 조건을 잘 따져 결혼하라는 이야기, 즉 감정은 영원하지 못하다고 암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연애관계에서의 종속과 집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감정이 지금 여기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만끽하려는 몸부림인 걸까요. 당신이 말했던 키치의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집착은 불안과 좀더 맞닿아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상대가 떠나갈 것이라는 불안을 스스로 가시화하고 싶지 않아서,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확인받고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게 상대를 깊게 사랑하는 방식이라 학습해온 이도 있겠지만, 일종의 분리불안과 같은 결을 띠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전적 정의로는 '유아가 모친에게서 처음으로 떨어질 때에 나타내는 반응'이라 되어 있네요. 연인은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면서 순식간에 남이 될 수 있는 사이입니다. 연애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별다른 법적효력없이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과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루어지지요. 때문에 더 애틋하고 든든하기도 하지만, 놓치는 순간 사라질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 불안에 대한 대책으로는 충분한 사랑과 믿음이 있을테고, 그것을 상대가 지금보다 더 표현해주기를 원하는 경우,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하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을 극도로 못 견디는 일이 생기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집착과 불안의 해결책은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합니다. 슬그머니 봄냄새가 나네요. 답장 기다립니다.



* '미완결', 네온비, 안나래, 다음 웹툰, 52화 중
** '유색의 멜랑꼴리', 비나리, 다음 웹툰, 48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