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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말한 사랑에서 키치가 하는 역할의 이야기는, 참 안도감을 줍니다. 이는 나의 키치에 대한 혐오가 자기혐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달콤함이 위험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안도감이라는 무형의 위협을 선뜻 취하지 못하겠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앞서 내린 키치에 대한 정의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정리한 키치의 의미를 가져온 것입니다. 상원의원의 예 역시 인용한 것이지요. 쿤데라는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 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들은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내가 전체주의라고 표현한 까닭은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주의의 발현(모든 부조화는 미소 짓는 연대감의 얼굴에 내뱉는 가래침이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주의(사소한 세목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자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삶, 그 자체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키치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버린 어머니나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해서 '교미하여 번식하여라.'라는 신성불가침한 슬로건을 위협하는 남자 또한 그렇다.”
사실 요즘 제가 키치에 관심을 갖는 데에는 정치적이거나, 이념적, 사회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키치가 하는 역할을 빼놓을 수도 없지요. 당신의 말대로 키치는 관계를 유지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지도 모릅니다. 해야할 것만 같은 것을 행하는 것이 키치니까 말입니다. 물론 키치는 ‘해야할 것만 같은 것을 행함’이라는 상황을 설명할 뿐 아니라, ‘해야할 것만 같은 것을 행해야 함’이라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쿤데라가 말한 것 처럼, 키치는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추방하려는 성질을 띄고 있기 때문이지요. 즉, 키치는 그 자체로 전체성을 띄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것’이 결코 설정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키치가 살아남을 수 없지요. 어떠한 이유로 가족을 버린 어머니는 ‘해야만 할 것 같은 것을 행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키치에 위배되는 인물이지요. 키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 어머니는 죄인입니다.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해서 -교미하여 번식하라-는 신성불가침한 슬로건을 위협하는 남자도 같은 이유에서 죄인이지요.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으니까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앞서 이야기한 (상원의원과 대화하는) 체코에서 온 여류작가는, ‘키치에 대한 대항’을 의식하고 만들어낸 자신의 작품을, 러시아의 체코에 대한 압제에 맞서는 작가의 작품으로 포장하려는 미술계의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녀의 출신지가 그녀의 작업물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당위를 제시해 주고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지요. 결국 그녀는 자신의 출신을 어느 정도 은폐하는데 성공합니다.
사랑에서 키치가 발생시키는 문제도 이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것이 갖는 전체성은, 사랑의 여러 다양한 측면을 은폐합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던 미디어를 통한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가 주입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지요. 사랑의 관계에서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키치의 독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치의 내재된 전체성으로 인해, 혹은 우리의 미숙한 자아감으로 인해 아니면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미디어나 언론을 통해 제공하는 이상적인 연애의 모델로 인해 스스로 다양한 사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사랑에서까지 키치의 독재를 받게 됩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동기인 여자친구가 꽃신을 받고 싶다는 말을 그녀의 친구를 통해 흘렸음을 알게 됩니다. 평소 학교에 군복을 입고 등장해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전역신고를 하는 몇몇 학우들을 보며 그러한 역할놀이에 심한 환멸을 느끼던 이 친구는, 여자친구 친구와의 소소한 언어적 공방 끝에, 수치심을 무릅쓰고 여자친구가 원한(다고 전해들은) 바를 실행합니다. 해야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바를 행한 것이죠. 혼전순결을 중시하던 나의 한 친구는 조금은 늦은 나이에 처음 만난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늘 빚을 지고 있는 마음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연애에서 다양한 사조가 존중된다면, 그 관계는 키치의 왕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4개월 정도 만남을 이어가던 그 친구는 육체적 관계의 문제로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의 친구를 이상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욕할 수 없는 것처럼, 이별을 통보한 그 남자를 섹스를 위해 여자친구를 사귀는 호색한으로 몰아갈 수 없겠지요. 하지만, 다양한 사조가 존중되지 않는 관계라면, 나의 이 친구는 마땅히 연인끼리 해야할 것을 하지 않은 반키치적 인물로 평가되거나, 그녀의 남자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땅히 그래야 할 것 처럼 육체적 관계없이 한결같이 사랑해주지 못한 호색광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전체성이라는 성질을 띄는 키치의 특성 때문에 나는 키치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물론 키치를 잘 활용해 그것의 긍정적인 면만을 받아들여 관계를 더 완만하게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치를 잘 활용한다는 것은 애초에 그것을 활용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다양한 사조가 존중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미 키치의 독재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나는 사랑에서 키치를 제하고 싶었던 겁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존중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키치가 사랑에게 끼치는 좋은 영향력은 그 관계가 키치의 독재에서 벗어날 여지여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키치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해 버렸네요. 다음엔 조금 덜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로 주제를 살짝 틀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