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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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답이 늦었습니다. 필멸성을 인식한 채 스스로의 미성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연애는 성숙합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어떠한 성숙은 멈춰있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불완전에서 완전에 가까운 형태로, 생각하는 성숙과 맞는 방향으로, 그렇게 몇 겹의 움직임이 있을 때 우리는 점차 성숙과 가까워집니다. 본디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성숙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도 행동과 생각을 한 발짝 씩 그와 가까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성숙한 것들은 늘 성숙해지는 과정 위에 올라타 있습니다. 그 위에서 스스로의 방향을 찾아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것들이지요. (그래서 '성숙'은 동사로서 존재할 때 온전한 말이라 느껴요. 살아 있다, 처럼요.) 이를 행하는 사람, 관계, 연애 모두 성숙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드렸던 질문은 연애에서의 집착이 믿음으로 상쇄될 수 있는가, 였는데요. 상대가 충분한 믿음을 제공하는 것이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물론 개인의 노력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집착 뿐만 아니라 연애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인 듯 해요. 스스로의 미성숙함을 오로지 상대로서 충족하려는 마음은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어렵지요. 서로 다른 것은 만나서 시너지를 낼 수 있지만, 서로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가능한 선에서 서로를 위해 행동해볼 수는 있겠지요. '원래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상대와 이 관계를 위해 얼마 만큼의 힘과 감정을 쏟고 싶은 지, 그들을 자신의 일상에 어디까지 들여놓고 싶은 지에 따라 취하는 입장이 달라지는 것 뿐이라 여겨요.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답을 주었는데, 듣고 떠오른 몇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전에도 잠깐 언급했던 <Her>와 <어바웃타임>, <화양연화>, <콜미바이유어네임> 같은 것들이 있네요. 순서대로 처음으로 슬픈 장면이 아닌 아름다운 장면에서 울게 되었던 영화, 눈길이 계속 갔지만 부럽지는 않던 영화, 서로 마음이 동하는 것과 함께 관계를 만드는 것 사이의 차이를 고민하게 만들던 영화, 어딘 지 불안한 사운드트랙에 내일없이 말갛게 웃던 모습이 오래 남던 영화입니다. 이 중 당신이 보았거나, 관심이 가는 영화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하면 어떨까 싶어요.


저는 요즘 어떤 관계가 끝나거나, 새로 벌어지는 과정에 관해 생각합니다. 미디어 속에서나 삶 속에서나 우리는 끊임없이 작고 큰 관계를 맺으며, 이들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과 형태로, 혹은 지겹도록 흔해빠진 모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간극을 우리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어서 늘 관계 안에서 넘어지고 붙잡고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구요. 이별 후 겪는 감정과 상황이 늘 예측 가능하다면, 왜 그렇게까지나 힘들겠어요. 사랑에 관한 경험은 이토록 제각각일테지만, 보편에 의해 관계와 끝과 시작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결들은 서로 닮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경험이 전제하는 것들도 있지만 '이것이 사랑!' 이라며 전시되어온 보편의 것들을 우리는 자연히 학습하고, 키치의 형태든 가치관의 형태로든 서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편 전제로서의 사랑을 공유하게 됩니다. 당신은 가지고 있는 전제가 서로 너무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대화가 어렵다고 말했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르네요. 전제나 바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대화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도 같은 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듯 합니다. 자꾸만 대화가 뻔해지니까요. 지금까지 당신과 제가 주고받은 편지들 안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얼핏 다른 입장을 고수하는 듯 했지만, 그러기 위해 꺼내든 말들은 죄다 사소한 차이들에 있었습니다. 방향만 살짝 틀면 충분히 서로의 말을 납득 가능한 곳에서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정도의 아우성만을 주고 받았지요. 어떤 연애에서 상대와 부딪히는 것은 사랑에 관해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에서 바라는 지점이 상충하기 때문인 것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에 관한 보편 가치가 서로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냐 싶은 마음입니다. 그저 서로 가진 결핍의 결이 다르고, 그 결로 비추어 바라본 사랑에서 보다 선명히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렇게 부딪힘과 흘러감을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편지를 받고 오래 고민하던 이유도 비슷한 결에 있었습니다. 대화가 자꾸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았고,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작품을 골라보자는 당신의 말을 따라보려구요. 우선은 생각나는 몇 작품을 적어보냅니다. 답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