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계곡이 함정카드를 발동시키다

Day 15. 페루, 친체로, 우루밤바, 쿠스코

<고산병에도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감행하다>

점차 고산병은 본격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침은 심해졌고 아빠는 여전히 잠을 설쳤다.

이런 컨디션으로 해발 3,700m가 넘는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감행하는 것은 무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남미까지, 이 페루 내륙 깊숙한 안데스 산맥의 쿠스코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진. 전진뿐이다.





<페루 쇼핑의 정점, 친체로 마을장>

투어의 첫 목적지는 친체로.

오늘 돌아볼 곳 중 가장 고도가 높은 곳이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우리를 약속된 장터가 아닌 기념품 가게로 먼저 데려갔지만, 뭐, 모든 투어가 그런 법이지.

가게에서는 알파카 털로 직물을 짜고 천연 염색을 하는 과정을 영어로 유창하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다 보니 어쩐지 미묘한 부채감이 생겨 뭐라도 하나 사야 할 것 같았지만… 너무 비쌌다.

천하의 호갱인 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다행히 함께한 여행자들이 이것저것 구매하는 틈을 타, 우리는 슬금슬금 문워크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GOPR1392.jpg

우리가 방문한 날은 마침 마을 장이 서는 날이었기에 기념품 가게를 탈출 후 드디어 마을 장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친체로 마을 시장!

좀 전의 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에 예쁜 물건들이 넘쳐났다.

이 친체로가 역대급 해발고도를 자랑하는 3700m에 위치하든 말든 알게 뭐냐.

도파민이 사악 돌면서 엄마와 나는 쇼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GOPR1404.jpg

마을 장터부터 조금 걸어올라 가면 친체로 유적이 있지만, 유적은 이미 많이 봤고 앞으로도 많이 볼 거 아닌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야!"

고산병의 특효약이 위용을 떨치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각종 파우치, 팔찌, 지갑, 열쇠고리, 모자, 가방... 사고 싶은 것이 넘쳐난다.

GOPR1390.jpg

엄마와 할머니의 쇼핑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꼬마쥐는 지겨워졌다.

처음에는 시장에서 만난 동네아이들과 놀았지만 그마저도 재미없다.

마찬가지로 쇼핑이 재미없었던 남편이 꼬마쥐를 데리고 유적지로 향했다.

20181230_103019.jpg

잠시 후 남편이 보내온 사진 속 딸아이는 친체로 유적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간 남미여행 중, 꼬마쥐는 유적지에서 매번 징징거렸다.

나는 아이니까 유적지가 재미없겠지 하고 대수롭잖게 넘겼는데, 꼬마쥐는 유적지가 재미없었던 게 아니라 유적에 정신이 팔린 엄마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할머니의 건강을 챙기는 엄마가 서운했던 모양이다.

아빠와 둘이 온전히 사랑받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꼬마쥐는 예쁘고 또 예쁘게 웃고 있었다.

20181230_104030.jpg




<모라이, 당신의 폐는 안녕하신가요!>

두 시간의 쇼핑 전쟁 끝에 친체로를 떠나 잉카의 농업연구소 모라이로 향했다.

바깥 풍경이 참 아름답다. 붉은 흙이 주는 색감이 초록의 들판과 대비되어 더욱 아름다운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비포장 흙길이었다.

흙먼지가 너무 많아 창을 닫자니 더워서 못 닫겠다.

20181230_135447 (1).jpg


이날 투어 차량이 꽤나 괜찮은 편이었기에, 에어컨이 잘 작동하리라 생각하고 기사님께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에어컨을 한 번도 안 틀었던 걸까. 이 엄청난 흙먼지들이 송풍구에 쌓여있다가 에어컨을 트는 순간 부아아앙~하고 차 안을 뒤덮었다.

으하하하 진짜 살면서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다.

차라리 흙먼지 조금 마시면서 갈 걸.

에어컨 튼다고 창까지 죄다 닫아놨어서 옹골게 당해버렸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그저 폐의 필터링 능력을 믿는 수밖에.

20181230_120340.jpg

그렇게 도착한 모라이.

겹겹으로 둥근 원이 층을 이루고 있는 이 유적은 고대의 농업연구 소였을 거라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으로 봤을 때에는 귀여운 사이즈일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생각보다 거대한 규모이다.

도대체 왜 이런 걸 만들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바르게 동그란 걸까.


그 와중에 꼬마쥐가 화장실에 가고 싶대서 화장실에 들렀다.

관광지니까, 화장실이 잘 되어있으리라 생각했고 혹시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쓰려고 일회용 종이 변기커버도 가져왔다.

그러나 또다시 페루는 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변기 커버가 없어. 플라스틱으로 된 말굽모양의 앉는 좌석, 그게 없다!!!

내가 준비한 일회용 종이커버는 무용지물.

아니 더럽든 깨졌든 변기커버가 있어야 그 위에 이 일회용을 놓을 거 아닌가.

결국 나는 딸아이를 안고 스쿼트 자세로 볼일을 보게 해야 했다.

정신력인지 체력인지 모를 무언가가 확실히 깎여나갔다.




<살리라네스 염전, 달려라 꼬마쥐!>

GOPR1467 (1).jpg

꼬마쥐는 도대체 어디로 이리 바삐 뛰어가고 있단 말인가?!

이번 목적지인 살리라네스 염전은 꼬마쥐가 손꼽아 기다리던 곳이었다.

소금이 만들어지는 산속의 염전이고, 짠물이 냇물처럼 흐른다는 말을 듣더니 아침에 할머니가 싸준 계란말이를 짠물에 찍어 먹겠다며 두 알을 싸왔기 때문이다.

여행이 지체되는 바람에 점심이 늦어져 배가 고팠지만, 꼬마쥐는 그 두 톨의 계란말이를 먹지 않고 염전에 도착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마침내 살리라네스 염전에 도착하자마자 녀석은 계란말이 통을 들고뛰었다.

달려라 꼬마쥐!!!

GOPR1474 (1).jpg

그렇게 도착한 염전은 소금물을 모아 증발시키는 고인 물들이 있는 구역과, 도랑을 따라 소금물이 흐르는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고인 부분은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흙탕물이다.

내가 아무리 아이를 자유분방하게 키운다지만 저기에 음식을 찍어먹는 건 안된다.

다행히 또랑물은 맑다.

맑아 보인다.

아무튼 맑은 거다.

그냥 이 정도는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되는 걸로 치자.

흐르는 또랑물을 찾아 계란말이를 콕 찍어 먹는 딸아이의 얼굴에 세상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나도 또랑물을 콕 찍어 먹어봤는데 우아아악 세상 짜다. 으어어어.




<우루밤바와 피삭, 방전된 우리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우루밤바의 한식당은 구세주 같았다.

단체 예약 때문에 자리가 없다던 사장님은 노부모와 아이를 동반한 우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기꺼이 받아주셨다.

사골 국물로 끓인 된장국은 지친 우리에게 그야말로 생명수였다.

너무 배고팠던 나머지 음식 사진은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

20181230_162457.jpg

하지만 에너지 충전도 잠시, 마지막 유적인 피삭에서 우리는 완전히 무너졌다.

온몸이 퉁퉁 붓고 으슬으슬 몸살 기운이 돌았다.

20181230_16 (1).jpg

마추픽추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기력이 없었다.

남편은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나 역시 몸살이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유적이 너무 아름다운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이 풍경에 들어올 수 있을까.

아쉬움을 삼키며 피삭에서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 그냥 지나가는 풍경도 너무 아름답다.

SE-3ddd88cb-6dc4-47d7-89f0-3f3ca28c2f0e (1).jpg

기사님께 잠시 세워달라 요청해서 사진을 찍었다.

사실 가족사진도 찍었는데 모두들 얼굴이 퉁퉁 부어있어서 도저히 -_-);;;;;;;;

그렇게 성스러운 계곡 투어가 끝났다.





<쿠스코, 후폭풍이 몰아치다>

쿠스코로 돌아온 밤, 우리는 처참했다.

엄마는 기침을, 아빠는 불면을, 남편은 두통과 소화불량을, 나는 몸살을 앓았다.

남편은 엄마의 민간요법에 따라 엄지손가락을 따야 했다.

과연 엄지의 고통으로 배의 아픔을 잊게 하는 조상들의 지혜인가.

그 와중에 쌩쌩하던 꼬마쥐마저 그날 밤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 비행기까지 삼일이나 여기 쿠스코 고산지대에서 더 머물러야 하는데, 이후 일정은 더 고도가 높은 볼리비아이다.

결국 부모님은 볼리비아를 포기하고 칠레에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는 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셨다. 남미에 대한 지식이 없는 부모님이 나 없이도 칠레에서 두 분만 지내실 수 있을까.


우리의 여행은,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20181230_103501.jpg


keyword
이전 14화개인사정으로 12월 4일에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