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칸차와 12각돌은 대체 언제 보는겨

Day 16. 페루, 쿠스코

by 다락방의 미친여자

<산소가 모자랍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 가족의 산소포화도를 쟀다.

정상 수치는 98이라는데, 엄마는 90 미만, 나머지 가족도 겨우 90을 턱걸이했다.

엄마의 기침은 더 심해졌고, 휴대용 산소캔은 별 효과가 없었다.

다행히 딸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했지만, 우리 가족이 이대로 버티기는 힘들어보였다.

결국 가족 회의가 소집되었다.

부모님만 먼저 칠레로 보내는 안, 일정을 조정하는 안.

하지만 항공편 예약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이 없었다.

연말인데다가 하필 쿠스코를 벗어나는 항공사 두 개중 하나가 운항정지를 맞아 일정 변경도 거의 불가능했다.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자."

부모님의 말씀에 우리는 일단 오늘의 일상을 살아보기로 했다.

고산지대에서는 쉬는 게 쉬는 게 아닌데다 집 안에 가만히 있으면 괜히 몸 상태에 더 신경쓰게 되고 불안한 생각만 든다.

차라리 집 밖으로 나가자.




<꼬마쥐 판초 원정대>

우리의 목적지는 산 페드로 시장.

엄마가 손녀에게 꼭 판초를 사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쿠스코 여행기에서 너무 많이 말해서 더 이상 말하기 민망하지만, 고산병에는 쇼핑만 한 게 없다.

진짜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페루의 신년은 노란색과 함께 한다.

노란색이 행운을 가져다 주는 색이란다.

그래서 연말연초에는 노란색 속옷을 입는다던데,

전통 시장 뿐 아니라 슈퍼마켓까지 온통 노란색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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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말의 활기찬 인파 속에서 나는 오히려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손녀의 판초를 사겠다며 저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야겠다고 하셨다.

"판초 따위 어디다 쓰냐고, 남아공 가면 안 입을 거라고!" 툴툴거리며 엄마 뒤를 따랐다.


내가 겨울이 추운 서울이나 살면 모르겠는데, 아프리카 사는 우리가족한테 저 알파카 판초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엄마는 이 년만에 만난 손녀에게 꼭 알파카 판초를 사주셔야만 한단다.

엄마가 이렇게 나오면 아무도 못이긴다.


이 때 나는 엄마 아빠와 다시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 남미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가족은 무척 고무되어 다음 해, 또 다른 여행지에서 만날 계획이었다. 항공과 숙박 예약도 다 끝내고 루트도 다 나왔더랬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모두 무산되고 우리는 결국 만으로 삼 년을 꼭 채우고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참 사람 사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곁에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나는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툴툴거렸을 뿐.


평소 남대문 시장에 단련된 엄마에게, 산 페트로 시장의 연말 인파는 아무 것도 아니었나보다.

기어이 그 속을 뚫고 들어가 꼬마쥐에게 딱 어울리는 예쁜 판초를 찾아내셨다.

그리고 그 판초는, 훗날 꼬마쥐가 남아공의 겨울 내내 가장 아끼는 옷이 되었다.

엄마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엄마는 다 안다.

IMG-20190725-WA0038.jpg 남아공에 돌아와 학교에도 잘 입고 다녔던 페루의 알파카 판초





<고향의 맛이 보약이지>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쿠스코에서 유명하다는 도넛 가게에 들렀다.

튀긴 꽈배가 속, 캐러맬이 진득하게 들어간 건강에는 나쁘지만 입에는 달디 단 디저트.

한 번은 먹을만 했다. ㅎㅎ


저녁은 예전부터 벼르고 있던 한인 분식집에서 공수해오기로 했다.

고산병으로 입맛을 잃은 가족들에게는 익숙한 맛이 최고의 보약일 터였다.

남미 카톡방에서 대화만 했던 사장님과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는 순간은 90년대 PC통신 오프라인 모임처럼 어색했지만, 사장님은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주셨다.

주문한 음식에 떡과 신년 케이크까지 덤으로 얹어주시는 따뜻한 정에 마음이 녹았다.

하지만 위에 주먹만 한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한 고산 증세 때문에, 그토록 그리워했던 떡볶이와 김밥을 사왔건만 가족 중 그 누구도 편히 먹지 못했다.

진심으로 임신 말기 증상 같았다. 그래도 맛있었다. 정말로.




<우리들만의 불꽃>

해가 지자 여기저기서 신년맞이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르마스 광장에 나갔어야 했지만, 며칠 전 딸아이가 겪은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다.

대신 우리는 낮에 시장에서 사 온 작은 불꽃을 들고 숙소 정원으로 나갔다.

타닥타닥, 작은 불꽃이 쿠스코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우리 가족만의 조촐하지만 따뜻한 불꽃놀이.


내일모레면 이곳을 떠나 더 높은 고도의 라파즈로 향한다.

부디, 우리 가족 모두가 무사히 이 여행을 마칠 수 있기를.


그나저나, 쿠스코의 명물이라는 코리칸차와 12각돌은 오늘도 보지 못했다.

산페드로 시장에서 기가 빨려서 12각돌을 보러간다는 걸 깜빡했다.

벌써 세 번째 실패다.

내일은 정말, 꼭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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