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7. 페루, 쿠스코
밤새 고산병과 씨름하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산소포화도는 바닥을 쳤다. 오늘은 드디어 쿠스코 마지막 날. 부모님은 내일 라파즈행 비행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셨다. 고작 한 시간짜리 비행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고도 2,000m대의 기압으로 맞춰진 기내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을 테니. 그 싫어하던 비행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웃펐다.
오늘은 순전히 딸아이를 위한 날. ‘코차와시 동물보호센터’에 가기로 했다. 인터넷 정보로는 아르마스 광장에서 12시 반 차가 있단다. 오전 중에 다녀와서 점심 먹고, 오후에는 부모님과 ‘드디어’ 코리칸차와 12각돌을 보면 완벽한 하루가 될 터였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투어가격은 랜덤뽑기입니다>
동물원에 예약을 하려고 왓츠앱으로 연락을 했다. 그런데 가격이 이상하다. 전화했을 땐 성인 35솔이라더니, 왓츠앱으로는 25솔. 왜 다르냐고 따지니 이번엔 30솔이란다. 아니 무슨 가챠뽑기인가. 매번 가격이 달라져. 이 고무줄 같은 가격 흥정에 지쳐갈 때쯤, 상대방이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럼 아이는 돈 내지 말고, 성인만 내세요." 오케이, 콜.
하지만 12시 반 버스는 마감됐고 10시 반 버스만 남았단다. 브라질까지 나중에 여행하면서 알게된 사실인데, 남미에서는 뒷 시간 예약을 하려고하면 무조건 거긴 마감되었다고 하면서 앞 타임부터 채운다. 진짜 이러기냐. 이때만해도 남미식 화법에 익숙치 않을 때라, 곧이곧대로 듣고 허둥지둥 10시 반 버스를 타기 위해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우리를 태우러 온 것은 봉고차가 아닌 2층 시티투어 버스였다. 동물보호소만 가는 줄 알았는데, 덤으로 쿠스코 시티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럭키비키잖아. 우리가 아직껏 가보지 못한 코리칸차도 지나가며 설명해준다. 뻥 뚫린 2층에서 바라보는 쿠스코의 붉은 지붕들은 색다른 풍경이었기에 제법 신나고 기분이좋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모님도 모시고 올 걸 그랬다며 아쉽기도 잠시.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보슬비와 칼바람이 몰아쳐 우리는 1층으로 피신해야 했다. 2층버스를 처음 타봐서 신났던 꼬마쥐는 1층에 내려왔다고 단단히 삐져버렸다.
<남미의 동물은 신기하구나: 코차와시 동물보호 센터>
삐진 딸아이를 달래며 도착한 코차와시 동물보호 센터는 기대 이상이었다. 천만 원짜리 코트를 만드는 비쿠냐, 사냥꾼에게 엄마를 잃은 아기 곰, 펑크족처럼 생긴 페루 전통 개, 남미의 너구리(?) 코와티, 이젠 자주봐서 정까지 들려고 하는 야마까지, 남미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동물들이 가득했다. 딸아이는 마른 풀을 받아 야마에게 먹이를 주며 비로소 기분이 풀렸다.
동물원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콘도르였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위용은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남편은 회색 깃털이 멋진 팔콘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나는 내 뒤에 슬쩍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는 팬 서비스 좋은 야마 덕분에 한바탕 웃었다. 2008년 영국에서 백조에게 빵을 삥 뜯긴 이래, '평화롭게' 동물과 교감한 두 번째 추억이었다.
<사탄들의 항공사에 오르비츠 여행사의 등장이라>
문제는 투어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다는 것이다. 샤먼 의식 체험, 하얀 예수상 관람까지 마치고 광장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 부모님과 코리칸차에 가려던 계획은 또다시 무산되었다. 그리고 진짜 재앙은 숙소로 돌아와서 시작됐다.
내일 라파즈행 비행기 웹 체크인을 하려는데, 오류 메시지만 반복해서 떴다.
‘안돼…!’
이 항공권은 사연이 깊었다. 원래 예약했던 페루비안 항공이 사고를 쳐 볼리비아 취항이 금지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두 배 넘는 가격을 주고 유일한 대안이었던 아마조네스 항공권을 사 둔 터였다. 그런데 그 표마저도 지금 휴지 조각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나는 표를 판 여행사 ‘오르비츠’와 항공사 ‘아마조네스’ 양쪽에 미친 듯이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길 뿐이었다. “여행사 문제다.” “항공사 승인이 안 났다.”
결국 나는 전화기를 내동댕이치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내일 좌석을 확보하기 전까지 카운터에서 드러눕기라도 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저녁 5시밖에 안되었건만, 아마조네스 항공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응 이미 모두 퇴근했어. 내일 다시와.' 텅 빈 카운터가 야박하게 말을 건낸다.
허탈하게 숙소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산병으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남편)을 모시고 육로로 국경을 넘어야 한단 말인가. 안데스 산맥을 넘어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 가는 그 길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했지만 장시간의 이동 및 높은 해발고도와 구불구불한 도로로 멀미유발자로도 악명이 높았다. 이미 체력이 바닥을 친 부모님이 이 길을 견디실 리가 없다.
쿠스코는 들어올 때도 말썽이더니 나갈 때도 말썽이다. 으아아악!
그리고 이 항공권과 드잡이질을 하느라 코리칸차와 12각돌은 그렇게 잊혀지고 말았다.
쿠스코에 8일이나 있으면서도 코리칸차와 12각돌을 못 본 건 우리 가족 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내일 비행기만 탈 수 있기를.